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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琉球)왕국의 슬픈 역사..

구태익 | 2018.02.02 01:01 | 조회 194
오키나와 여행 다녀온 지가 1주일이 지났네요. 그간 차일피일 하다가 오늘 생각나 오키나와 역사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봅니다. 공감하셔도 좋고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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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키나와(沖繩) : 면적 1,206.93㎢(제주도 면적의 약 ⅔ 일본 영토의 0.3%) 인구 약 143만 명. ‘오키나와’라는 이름은 오키나와語 \'우치나\'를 한자로 바꾼 것이라 하는데, ‘우치나’는 “바다 앞(沖)에 친 줄(繩)”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https://namu.wiki 에서 인용)

▶ 하지만 나는 이를 두고 일본이 류큐(琉球) 즉 ‘구슬 공’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나라를 빼앗아 자기들의 땅으로 강제 편입시킨 뒤 오키나와 \"먼 바다(沖)에 (버려진) 새끼줄(繩)\"이란 이름으로 격하시킨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2. 역사

- 류큐(琉球)왕조 시대(1429~1879) : 11세기 무렵부터 ‘아지’라고 불리는 호족들이 각 지역을 지배해오다가 14세기에 들어서 南山ㆍ中山ㆍ北山 3개의 작은 나라가 성립되었다. 이 세 나라는 각각 중국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관계이었으나, 1429년 남쪽 나하(那覇)에 근거지를 둔 쇼하시(尙巴志) 왕조가 三山를 통일하여 류큐(琉球)왕국을 건국하였다. 류큐왕국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한편 지리적 장점을 살려 일본과 조선 및 동아시아와 포르투갈과 중계무역을 하면서 번성을 누렸다(https://ko.wikipedia.org/).

▶ 한편 고려시대 삼별초가 1273년(원종 14년)에 제주도에서 몽골군에 패한 후 오키나와로 건너가 류큐국 혹은 首里國을 건국했다는 설도 있다.


- 사쓰마(薩摩)지배 시대(1609~1879) : 약소국이긴 하지만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류큐왕국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9년 느닷없이 ‘사쓰마(薩摩 : 오늘날의 가고시마)’ 영주를 시켜 조총부대 3,000명을 이끌고 류큐를 침공하게 한다. 전혀 무방비 상태이던 류큐왕국은 이렇다 할 저항 한번 없이 왜놈들에게 항복하고, 왜놈들에게 人頭稅(주민 한 사람당 일률적으로 부과하는 세금)를 바치게 된다. 이후 류큐는 \"중국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일본은 우리의 어머니이다.\"라는 식으로 외교노선을 설정, 중국과 일본 양쪽에 모두 조공을 바치면서 독립을 유지한다(https://ko.wikipedia.org 인용).

▶ 내 생각엔 아마도 류큐인들은 작은 나라여서 대국인 명나라만 잘 모시면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을 터이니, 평화롭게 잘 살 수 있으리라 여기었을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치르느라 피폐해진 일본은, 전란으로 명나라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자 이 틈을 노려 총칼로 류큐를 협박하여 간단히 접수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일본은 직접 통치는 하지 않고(멀어서 직접 통치하기도 어려웠을 듯) 동네 깡패들이 동네가게에 자릿세를 뜯어가듯 순박한 류큐인들을 위협해 人頭稅를 뜯어간 것이다.

그 이전 명나라 조공은 상징적인 것이었다면 왜놈들의 人頭稅는 살인적이어서 류큐왕국은 인구 조절의 필요를 느껴, 하루 3번 종루에서 종을 쳐 제때 모이지 않는 사람은 아이든 어른이든 처단했다 한다. 동네 깡패에게 가혹하게 돈 뜯기면서도 저항은커녕 오히려 자국민을 처형함으로써 인구수를 조절하려 했다니... 무능하고 연약한 이런 정권이 어디 있나? 이게 나라냐? 류큐인들에게 자주의식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무방비 상태에서 왜놈들에게 당한 뒤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조총을 사모으고 築城을 하여 一戰을 각오하고 일본과 대항했어야 했다는 생각이다. 가장 가까운 일본 본섬인 가고시마로부터 700km 가량 떨어져 있으니, 출병도 만만치가 않고 해류의 흐름이나 지형•지세에 익숙하지 않아 일본으로서도 전쟁이 상당히 부담이 되는 상황인데... 아마도 이순신장군 같은 훌륭한 전략가도 없고, 더운 남쪽 나라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순진하고 착하기만 했지 독하고 모진 성격이 아니어서 중국과 일본 양쪽으로 뜯기면서도 \'좋은 게 좋다\" 하며 살아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 류큐왕국의 멸망(1879) : 일본은 1868년 明治유신을 선포하고, 제국주의 길로 접어들면서 1879년 일방적으로 ‘류큐처분‘을 내려 160여 명의 경찰과 400여 명의 군대를 보내 류큐왕을 폐하고 류큐왕국을 오키나와현으로 강등하여 일본 영토에 편입시킨다. 류큐국의 쇼타이 왕은 일본정부에 의해 강제로 도쿄에 이주당해 侯爵으로 봉해진다(대한제국 멸망과 거의 흡사). ’류큐처분‘ 이후 일본은 한일강제병합이후 우리에게 그랬듯이 류큐語 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류큐인을 일본에 동화시켜 나간다. 일본은 오키나와를 일본 땅에 편입시키면서 처음에는 류큐縣이라 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류큐라는 명칭이 본시 명나라가 류큐 왕을 책봉하면서 사용했던 명칭이기 때문에 명나라의 뒤를 이은 청나라가 종주권을 주장할 것에 우려해, 류큐라는 이름을 버리고 현지 주민들이 스스로를 불러온 지명인 오키나와를 행정구역 명으로 채택하여 지역 범위를 확대했다고 한다(https://namu.wiki 인용)

▶ 이는 명치유신을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제국주의적 침략이 대세인 국제정세를 간파하고, 국제법의 미명하에 약소민족의 땅을 총칼로 위협하여 간단히 말뚝 박고 서류를 꾸며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이누族들이 평화롭게 살던 오늘날의 북해도를 그렇게 빼앗았고, 구한말 나라가 어수선하던 시절에 우리 땅 독도를 일방적으로 저들의 땅으로 편입시키는 소위 ’시마네현 고시‘나 을사늑약을 정당화하는 ’한일합방‘도 그러한 일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큐왕국은 600명도 되지 않는 무장군경들에게 힘 한번 써보지도 않고 간단히 항복해버렸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투쟁에 대해서도 기록은 없다.


- 태평양전쟁 말기 90일간의 처절한 전투(1945) : 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일본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본토방어 시간을 벌고자 오키나와를 방패막이로 사용한다. 미군 입장에서는 오키나와를 장악해야 본토 공격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으므로, 오키나와의 전략적 가치가 매우 중요하였다. 수비하는 일본 제32군은 총 병력 10만 명 이상으로, 주력은 육군 제24사단과 제62사단, 독립혼성44여단 등 약 3만4,000명이었다. 군사령관은 우시지마 미찌루(牛島滿) 중장, 참모장은 죠 이사무(長勇) 소장이었다. 이에 대하여 미군은 상륙부대의 주력으로 사이몬 버크너 육군중장이 지휘하는 신설 제10군 예하 제3해병군단과 육군 제24군단 등 5개 사단 8만 5,000명을 투입하였다. 83일에 걸친 전투에서 미·일 양쪽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측 추산으로 일본군 전사자는 10만 2,000명, 미군 전사자는 4만 7,000명이며, 미군 추산으로 일본군 전사는 6만 5,000명, 미군 전사자는 1만 1,933명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 오키나와 본섬 주민들로, 사망자가 12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 오키나와전투, 두산백과). 이 전투에서 일본은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오키나와 민간인(14~70세 남자와 여학생들)을 동원하였고, 막판에는 ‘미군에 항복하면 여자는 강간한 뒤 죽이고 남자는 사지를 절단해 처참하게 죽인다’는 거짓 정보를 주어 집단자결을 강요하였다. 이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끔찍한 비극이 곳곳에서 벌어졌다(『Just go 오키나와』. 시공사)

▶ 간악한 일본은 그들이 보기엔 식민지였던 오키나와를 희생함으로써, 일본 본토를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즉, 자기네 백성이라 여기지 않는 류큐인들을 전원 몰살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미군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내려 했던 것이다. 마치 거의 승패가 결정난 야구경기에서 지고 있던 팀이 9회말 2사후 만루상황을 만들어 상대팀 진땀을 빼듯이 ‘일본은 전원 자결을 했으면 했지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주려 한 것일 게다. 오키나와를 점령하는 데 미군이 그 정도 희생을 치르고 수많은 오키나와 원주민을 살상해야 했다면 일본 본토를 점령하려면 얼마나 거센 저항과 미군의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지를 협박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미국으로서는 모골이 송연한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무모한 희생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패망을 재촉한다. 오키나와 전투를 치르고 진저리가 난 미국은 도저히 이런 재래의 방법으로 전쟁을 끝낼 수 없다고 판단하여 가공할 원자폭탄을 동원할 결심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이 아무리 저네들이 억울한 원폭피해자들이라 외치며 평화 코스프레를 한다 하더라도 미국의 원폭투하 결정은 일본이 자초한 일이라 여긴다. 애꿎은 한국인들이 덤으로 희생당한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간악한 일본은 천벌을 받은 것이다.


- 미국 통치시대(1945~1972) :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과 강화회의를 맺고 일본을 독립국으로서 지위를 인정하는 대신 오키나와는 미국에 넘기기로 합의한다. 이로부터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한 1972년까지 27년간 미국은 오키나와에 대해 사법•입법•행정권을 행사하고, 美공군기지를 건설하여 한국전은 물론 베트남전과 최근 아프간전쟁, 이라크전쟁까지 미군의 공격발진 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 일본 반환 후 현재까지 : 1969년 일본 사토(佐藤)수상은 닉슨 대통령과 합의하여 미국이 오키나와 미군기지 원소유주에게 지불할 반환지 원상회복비 400만 달러를 일본정부가 떠맡는 조건으로, 일부 미군기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1972년 일본에 반환한다. 지금도 反戰지주 3,000여 명은 다른 나라 침략기지로 사용되는 땅(미군기지)을 빌려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일본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なんくるないさ(어떻게든 잘 될 거야)”라고 말하며 밝게 산다(엔조이 오키나와. 넥서스북스).

▶ 만약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독립의지가 있었다면 2차 대전 이후 미국 통치를 거쳐 일본으로의 반환을 논의할 때 이를 거부하고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순해 빠진 오키나와사람들은 일본으로의 편입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일부 인사들 예컨대 오키나와 출신 1990년대 유명 아이돌 1977년생 아무로 나미에(安室奈美?)가 천황이 자리한 만찬장에서 일본국가인 ‘기미가요(君が代)’ 부르기를 거부했다던가 총선에서 4명에 불과한 지역구 의원으로 자민당 소속을 뽑지 않는다던가 하는 소극적 저항에 그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 최근 ‘오키나와 타임즈(2016년 3월15일자)’에 따르면 오키나와국제대학교 토모시리 마사키교수가 실시한 재학생 설문조사 결과 ‘오키나와 독립을 생각해본 적 있느냐?’는 질문에 30%만이 그렇다고 답했고, ‘정치•경제•안전체제가 성립한다면 독립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찬성이 38%, 반대 28%, 모른다가 34%였다고 한다(http://cafe.naver.com/booheong/1360...).

▶ 그러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독립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안중근의사나 류관순열사와 같은 애국선열들의 강렬한 독립의지와 피맺힌 항전의 결과임에 깨닫고 늘 애국선열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일제 식민지 35년 내내 우리의 독립투사들과 임시정부가 지속적인 독립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카이로 회담과 포츠담 선언에서 연합국들이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라고 명시하였겠는가?

다시 생각해보면 황무지 땅이었던 북해도는 ‘아이누’라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인구도 적고 문화수준도 낮아, 왜놈들이 밀고 들어와 나름 인프라 투자도 많이 하면서 오늘날의 북해도로 발전하게 한 공은 인정할 수 있다. 그건 마치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인들이 몰려와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저들의 나라를 건설하여 오늘날의 미국이 된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누나 인디언들을 미개인 취급하여 인권을 유린한 것은 용서할 수 없지만...

하지만 오키나와는 다르다. 류큐(琉球), 즉 ‘구슬 공’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문화적으로도 풍성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독립왕국을 총칼로 무력화하고 지네들 마음대로 저들의 땅으로 편입시킨 뒤 오키나와, 즉 \"먼 바다(沖)에 (버려진) 새끼줄(繩)\"이란 이름으로 격하시킨것도 모자라 총알받이로 내몰아 당시 인구의 1/4 이상이 희생되는 비극을 맞게 한 일본의 간악함에 치를 떤다. 북해도와 오키나와를 날름 집어삼킨 뒤 여세를 몰아 같은 방법으로 한반도까지 먹었으나 조선인들은 만만치가 않았다. 우선 인구에 있어서도 일본의 2/3 가량 되는데다 일본을 왜놈이라 여기며 깔보았던 자부심에 호락호락하게 항복하지 않으니 일본도 적잖이 부담스럽긴 했을 것이다.

▶ 내가 가장 분통 터져 하는 것은 2차대전 이후 같은 전범국가인 독일은 미•영•소•불 4국이 분할 점령하였는데, 일본은 그대로 독립을 유지하고 오히려 일제의 고통을 받았던 한반도가 남북으로 양분되어 지금까지도 고통을 받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제대로 되었더라면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미국과 중국•소련이 일본을 3등분으로 나누어 홋카이도(北海道)는 소련에게 주고, 혼슈(本州)는 미국이, 시코쿠(四國)와 큐슈(九州) 그리고 오키나와(沖繩)는 중국에게 넘겼어야 했다 : 미국이 힘이 세긴 하지만, 중국은 중일전쟁에서 남경대학살로 30만 명의 민간인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국토가 유린되었으니 좀 더 많이 줘야 한다. 하지만 정말 운 좋게도(물론 간악한 일본의 공작도 있었겠지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념갈등으로 소련을 견제한 미국은 북해도를 소련에게 넘기지 않았고, 國共내전으로 정신없던 중국은 일본 땅을 그저 준다 해도 지네들 내전으로 경황이 없던 터라 받을 생각도 않았을 것 같다. 그러니 애꿎은 한반도가 남북분단이 되고, 곧이어 한국동란으로 전쟁특수를 챙긴 일본이 재기의 기회를 얻은 것은 정말 천추의 한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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