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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영정의 선비들...

끈! | 2002.06.05 01:01 | 조회 4436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식영정은 가사문학의 산실이다. 그러나 식영정에서 태어난 가사문학은 이곳을 찾는 선비들의 언론 수단이었을 뿐이다. 당시의 가장 멋진 의사소통 기구인 시를 주고받으면서 세월과 세상을 한탄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았던 것이다. 고뇌하는 지성인, 士林 1세대에 속하는 이 다섯사람의 만남은 나중 \'호남사상 호남문화\' 물줄기를 잡아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들 지조있는 선비들 밑에서 나중 조선중기 국가의 몸통 역할을 하는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식영정 주 고객인 임억령과 김성원, 고경명에 대해 알아보자..(지금 임억령의 동생 임백령은 지금 방송중인 연인천하에 나오고 있다..맞나?)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
석천이 남도정신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을 말하라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깨끗한 공직자상\'이다.
석천의 성격을 엿보려면 \'해남사화\'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해남에는 5백년 넘게 임씨 형제 얘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이른바 해남사화의 두 주인공인데 두 형제의 엇갈림을 통해 조선중기 권력층의 갈등을 알 수 있다. 자 해남사화 속으로 떠나자.

선천적으로 명석한 두뇌를 타고난 임억령과 동생 백령은 어린시절부터 글재주가 비범했다. 둘다 신동소리를 들으며 자라 당대 석학인 눌제 박상(訥齊 朴祥 1474-1530)선생에게 수학했다. 억령은 기질이 소탈하고 세속에 구애받기 싫어한 반면 백령은 자상하고 잡된 구석이 많아 스승의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중종 14년. 백령은 생원시에 합격해 진사가되고, 억령은 병과에 합격해 함께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벼슬길에서부터는 둘의 희비가 엇갈렸다. 억령은 외직을 주로 거쳤고 백령은 실세의 내직을 달려나갔다. 특히 억령은 무산안일로 농민에 대한 가렴주구를 자행하는 훈신들의 농간에 염증을 느끼며 여러차례 임금에게 상소문을 보내 관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반면 백령은 기질이 호방하고 기백있어 청산유수의 언변과 능문능서로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문정왕후의 총애로 을사사화의 주동인물이 된다.

조선 12대 인종이 부왕 중종으로부터 전위한지 불과 일년도 못되어 승하하고 어린 이복동생 명종이 12살로 즉위하자 그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 섭정여왕이 되어 섭정을 반대하는 선비들을 모두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획책했다. 당시 호조판서로 있던 백령이 그 거사를 주동했다. 금산군수로 있던 억령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상경해 동생을 붙들고 거사를 중단하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출세욕이 강한 권세주의자 백령은 끝내 형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억령은 동생이 보는 앞에서 자신과 동생의 초석 중간을 절단하고 형제의 의절을 선언한 뒤 비분강개해 내려와 버렸다. 벼슬을 버렸음은 물론이다. 형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을사사화는 윤형원 임백령이 주동이 되어 계획대로 가혹하게 수행되어 어진 재상과 선비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거사에 성공한 백령은 일등공신이 되어 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원종공신 녹권을 고향의 형 억령에게 보냈지만 억령은 감히 임금의 녹권을 그 자리에서 불태워버렸다. 해남사화다.

이런 임억령의 살신성인 구국정신을 배운 임극협 등 아들과 손자 3명은 임진왜란때 이순신 휘자 장수로 명량대첩 한산도대첩에서 큰 공을 세우게 되지만 백령은 거사 얼마 안돼 객사했다. 잘못된 삶의 어두운 결말이었다. 그러나 석천은 가족에게만 이렇게 가혹한 것이 아니었다.

1540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백성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처벌받는 것을 보고 임금에게 이런 정치론을 폈다. \'신하들이 간하는 말을 듣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고,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간하는 말을 즐거워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간하는 말을 듣기만 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듣는 것이 유익함이 없고, 받아들이면서 즐거워하지 않으면 간하는 신하는 날로 소외감을 가질 것입니다. 요즈음 시종들이 행정폐단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몸소 반성하여 잘못을 고칠 것이요 비록 잘못이 없다 할지라도 반드시 스스로 반성하여 전하 자신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잘못이 없는데 어찌 이런 말이 있는고 하시어 더욱 노력하여 광명정대한 덕을 쌓아 여러 신하들의 의심을 풀어주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제 신 등이 언관의 직책으로 자리를 옮긴 뒤 청백한 행정에 대해 전하의 물음이 있을 때 연구하여 전하께서 듣기를 싫어하고 기뻐하지 않는 말을 아뢴다면 멀지않아 천리 밖으로 쫓기는 몸이 될 것이요, 그로말미암아 언로가 막히어 마침내 백성이 구제되지 못할까 심히 걱정되는 것입니다.\' 바른 언론관, 백성의 소리를 바로 전하는 신하의 말을 새겨들으라는 말, 임금은 석천의 이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그리고 매사 바른말로 귀를 괴롭히는 석천이 미웠을 것이다. 그러나 임금은 곧 석천의 말을 이해하였다. 임억령이 식영정에서 해남으로 돌아가 별세했을 때, 왕은 예조정랑을 보내 제문을 내렸다. \'임억령은 뜻이 높고 행동도 결백하였기에 간사한 자들을 미워하다가 드디어는 그들에게 베제를 당했도다. 올바른 방향으로 아우를 꾸짖었으며 녹권을 불살라 자신을 격려했다네. 문장을 연구하는 것은 그 밖의 일로 여겼으니 뛰어난 인물이었지. 말씀마다 뜻이 담겨있고 그의 모습 엄격하였으니 누구든지 그의 교훈을 들으면 겁쟁이는 자립할 수 있고 욕심쟁이는 청렴해질 것이다\'

임억령의 올곧음과 청렴성은 나중 조선선비들의 귀감이 되어 정치 경제 문화 윤리 도덕 등 여러 방면의 나침반이 되었다. 바로 이 나침반이 수많은 내우외환의 고통을 흔들림없이 이겨내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아마 IMF라는 대 국가환란을 이겨낸 우리의 저력도 이런 선대의 정신사 속에서 우러나왔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임억령을 존재케한 스승 눌제 박상 선생은 기묘사림들의 결속력을 부채질하며 사림1세대로서 훌륭한 역할 해냈으며 임억령이라는 빛나는 제자를 만들어 이 무등산 원효계곡을 살찌운 것이다. 호남사림연원표에서도 봤듯이 눌제 박상과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는 조선중기 3대 士林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생각과 가르침이 당시 이 지역사회의 중심이었고 사상이었다. \'바른행동\'으로 민중의 귀감이 된 눌제 선생. 己卯士林 1세대답게 우리가 지표로 삼을만한 바른 공무원상을 실천으로서 제시한 인물. 석천 임억령은 바로 눌제 선생의 이런 節義와 용기를 닮은 것 같다. 그 스승의 그 제자답게 행동한 것이다. 아마 임억령은 눌제선생의 깊은 가슴을 알아차려 스승과 같이 되려고 노력한 것 같고, 같은 제자이지만 임백령은 선생의 가르침을 문자로만 배운 것이 아닌가 싶다. 가끔 진심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듯이. 다시 식영정으로 돌아와 임억령의 제자, 식영정을 지은 사람 김성원을 만날 차례다. 식영정 마루에 빙 둘러앉을 때 다른 사람들은 편한 자세로 앉아 시를 주고받았겠지만 김성원만은 스승 앞이라 무릅을 꿇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스승과 스승의 벗이 세상을 비판하고 시를 주고받을 때 김성원은 그분들 심부름을 하며 조신하게 옆 귀퉁이에 앉아 차례가 오면 얘기를 꺼낼 수 있었을 것이다. 식영정 마루턱에 겸손하게 손 모으고 앉아 스승들을 바라보는 그런 김성원을 떠올리며 만나보자.


▲서하당 김성원(棲霞唐 金成 1525-1597)
송강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의 첫 머리는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로 시작된다. 성산별곡의 첫 시구에 등장하는 그 중인이 바로 서하당 김성원이다. 식영정이라는 엄청난 역사적 공간을 만들어놓고도 송강 정철에 가려 조명이 안된 인물이다. 그러나 스승 임억령에 대한 그의 존경심, 주변 士林선비들을 모시는 그의 태도를 보건데, 그 역시 보통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김성원이 이곳에 식영정을 지은 것은 이곳 지리를 그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다름아닌 석저촌, 지금의 충효동으로 식영정에서 내려다보이는 광주호에서 조그만 올라가면 된다. 이 근처에서 뛰어놀며 자란 그는 무등산 이 자락이야말로 스승과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기에 제격이라고 여긴 듯하다. 서하당은 7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8살때부터 당숙인 김윤제에게 글을 배워 34세때 사마시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고향에 머물며 학문과 풍류에 집착했는데, 거문고의 명수였다고 한다. 당시 서하당이 있어 이 계곡은 좀더 낭만적이었지 않나 싶다. 강호에 묻혀 재야학자로 활동했지만 서하당의 학문은 매우 높았다. 당대의 쟁쟁한 士林인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과 어께를 나란히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서하당의 묘지명이 그것을 증명한다. 임서하가 지은 묘지명을 보면 \'국가의 인재가 명종 선조시대처럼 명함이 없었다. 문장과 덕행이 일시에 연이어 나오니 공의 이름이 그 사이에 견비하였다. 어머니를 위해 몸을 바침이 80의 고령인데 효성도 도움을 보지 못했으니 한이 창천하도다\'고 되어있다. 이 묘지명에서 어머니를 위해 몸을 바쳤다함은 무슨 말인고하니, 1597년 그의 나이 73세때 정유재란이 나 화순경제를 침범해오자 그는 동복 뒤산인 성모산성으로 늙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피난하던 도중에 왜적들을 만나자 노모를 보호하기 위해 서하당 내외가 함께 달려들어 몸으로 막아 싸우다가 모두 죽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 산을 모호산(또는 모후산 母后山)이라 하고 이 마을이름도 모호촌이라 고쳐 부르고 있다. 시간이 나면 오던 길을 되돌아가 모호촌과 모후산을 들러봐도 좋을 듯 싶다. 여기서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다.

서하당이 정유재란때 어머니를 업고 피난을 갔다니까 마치 현실을 도피한 것처럼 비쳐질까봐 임진왜란때의 활약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나이 68세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 지역 지리를 잘 아는 서하당을 동복현감으로 임명했다. 전쟁때 관직에 나간 그는 각지의 의병들과 제휴하여 백성들을 보호했고 재종질 되는 김덕령 형제가 의병을 일으키자 병기와 군량 등 많은 물자를 마련해주어 의기를 북돋웠다. 특히 식영정 마루에서 시를 주고받으며 돈독했던 제봉 고경명이 임진왜란 당시 호남의 병장이 되자 동복지역에서 많은 의병을 모아 보내주기도 했다. 식영정 마루에서 주고받은 국가관과 충절을 직접 실천하고 나눈 것이다. 붓을 들고 시를 썼던 식영정이 하루아침에 전쟁터로 변해 고경명과 김성원은 의병 참여 호소문을 쓰고 붓을 과감히 던진 뒤 칼을 들었다. 장군과 선비가 엄연히 구분되었던 그 시절, 시골 구속에 박혀있는 이들 선비들의 의병봉기는 나중 이 계곡이 義의 상징이 되도록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식영정에 둘러앉아 \'식영정 20영\'을 읊은 이 다섯명이 이뤄낸 역사적인 족적은 이렇게 대단하다. 따라서 이곳을 둘러보며 술상을 차려놓고 가사문학을 주고받았다는 설명은 식영정에 대한 모독이다. 이들이 자연을 예찬하며 시를 지은 것은 마음이 허해서 일 것이고 나랏일이 사뭇 걱정되면 술을 한 잔 했을 것이고 취하면 시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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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답글 답사 참고자료입니다. 수정했음당~ 첨부파일 정근 2870 2002.02.11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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