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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문화' 일본의 할복자살에 관하여

구태익 | 2002.06.01 01:01 | 조회 5439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일본인들의 할복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마

1. 할복이란 무엇인가?


세계역사상 보기 드문 독특한 일본인 특유의 자살방법으로, 배를 가르고 죽는 것을 말하는데 切腹(셋뿌꾸せっぷく) 또는 切腹り(하라키리はらきり)라고도 한다.

2. 할복의 정치적 배경

일본에서 할복이 성행한 배경은 일본인의 민족성에서 찾아와야 할 것이다. 아시다시피 일본은 섬이며, 일본인은 섬사람 근성 즉 폐쇄적이고 자기위주적인 성격이 크다. 이는 좁은 섬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서로 뭉쳐야 되고, 외부인에 대해서는 배타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일본은 섬나라이면서도 각각의 섬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천하를 통일하기 전까지는 수십개의 작은 나라들로 나뉘어져 끊임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규슈(九州)는 이름에서 보듯이 9개의 나라로 구성되어 있었고, 시코쿠(四國)는 4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전투에 나가서 진다는 것은 곧 국가의 멸망과 더불어서 일가의 멸족을 의미했으므로 이들 소국가들은 영주를 위시한 \'사무라이(고구려에서 무사를 일컬었던 \'싸울아비\'가 일본에 건너가 사무라이가 되었다고 함)\'들을 중심으로 무(武)가 숭상되었으며, 사무라이들은 그들의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저 칼싸움 연습만 부지런히 하고 있다가,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전투에 나가서 용감무쌍하게 잘 싸우기만 하면 되었다.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사무라이들의 위상은 점점 높아져갔고, 일본인들의 공격적인 성격 또한 드높아져 갔다. 검도는 사무라이들의 자식들에게 필수 과목이 되었으며, 칼을 중심으로 하는 \'칼의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즉 공격성, 잔인성, 단칼에 베어버리는 단호함, 강인함 등의 문화를 말한다.

3. 사무라이들의 잔인성

그러나 일본에서의 칼의 문화는 사무라이들 중심이었지,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 칼이 두려움과 존경의 상징이었다. 일본인들의 순종적인 성격(?)은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사무라이들은 훌륭한 검을 지니는 것이 큰 즐거움이요, 영예였기 때문에 그들은 좋은 칼을 구입하기를 갈망하였으며, 멋진 칼을 구입했을 때는 대단히 좋아하고 흥분했다.

그래서 그런 훌륭한 칼을 손에 넣은 날은 일찌감치 저녁식사를 마치고 칼을 잘 닦은 다음, 허리춤에 끼고 소화도 할 겸 집 밖으로 산보를 나섰다. 산보를 하다가 적당한 대상(죄 없는 일반 백성)과 마주치면 단 칼에 그 백성의 목을 베어버린다. 즉 새로 산 칼을 테스트해 보는 것이다. 단칼에 목이 잘 베어지면 그 사무라이는 씩 웃으면서 \'이 칼은 꽤 쓸만하군, 잘 샀어\'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야만적이고도 잔인한 것들...

이런 경우, 칼을 맞은 백성측에서는 아무런 대응도 못 했다. 당시 칼 두 자루(큰 칼은 공격용으로 작은 칼은 자살용으로 사용되었다고 들었었다)를 차고 다닐 수 있는 자격은 사무라이들에게만 있었으며, 백성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도 못했다.

4. 사무라이와 할복

사무라이는 세습되었으며,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주에 대한 무제한의 충성심, 검소한 생활, 무사로서의 멋있는 태도와 책임감 등이었다. 그들은 할복이라는 방법으로 자살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것으로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였다.

즉 할복을 하는 경우의 첫 번째는 사무라이가 큰 실수를 저질렀거나 자기가 모시는 군주에게 폐를 끼친 경우다. 이런 경우 깨끗이 할복함으로써 책임을 진다. 즉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할복한다.

다음에는 여러 가지 일로 인해서 할복을 명받는 경우다. 상부로부터 \"배를 갈라라(너 배째)!\"하고 명을 받게 되면 즉각 갈라야 된다. 그리고 기타 전투에 졌다든지, 상부에 대한 무언의 항의, 사무라이로서 수치스러운 꼴을 당한 경우도 할복했었다.

즉 목숨을 걸고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무사로서의 도리라는 것을 할복함으로써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할복은 강요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할복을 함으로써 사무라이 자신이 저지른 책임과 죄과는 어떠한 것이든 용서받을 수 있었고, 이것의 의미는 자신은 죽지만 자신의 처자식들은 계속적인 권력의 확보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할복이라는 것은 일본에만 있는 자살 방법이다. 우리나라에도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극히 드물었다. 아마 칼을 항상 끼고 살았던 사무라이 나라였기 때문에 배를 가르는 할복이라는 방법이 발명되었을 것이다. 즉 이러한 할복으로 자살함으로 해서 집권층의 특권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5. 할복의 방법

그러나 이 할복이라는게 그리 간단한 방법은 아니었다. 거기에도 예식과 절도가 있었다. 그리고 할복도 잘해야(?) 했었다. 다시 말해서 할복한 후에 평가가 매겨지곤 했는데, 훌륭한 할복은 자세를 끝까지 흩트려뜨리지 않고, 되도록 칼을 깊숙이 찔러넣어서 최대한 길게 잘라야 했다.

예를 들면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에서 아랫 배의 왼쪽 편에 칼을 깊이 찔러 넣는다. (보통 사무라이들은 이것으로 할복이 끝나고 뒤에 서 있던 동료가 칼로 목을 쳐준다. 목을 쳐주지 않으면 격심한 통증을 못 참게 되어 자세가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 칼을 배의 오른쪽까지 죽 긋는다.
여기까지만 해도 대단한 할복에 들어간다.

그러나 더욱 독한 사무라이는 그 칼을 직각으로 돌려서 위로 세운 다음, 오른편 가슴 위에까지 그어올린다. 이 정도면 최고의 할복이다. 허걱!!

그런데 그 위에 더욱더 독한 사무라이는 그 칼을 뽑아서 자기 목의 경동맥에 찔러넣어 완전히 자기 목을 따버리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동료가 목을 쳐줄 필요도 없다.

자기 목까지 찔렀던 할복은 그 케이스가 매우 적었지만 그들은 할복 후 최대의 찬사를 받았었다. 할복이라는 자살방법은 이처럼 정말 섬뜩하고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할복에도 철학(미학 ?)이 있다. 일본의 유명한 현대작가였던 미시마 유키오(1925~1970)는 1970년 11월 어느날 돌연히 그의 제자들인 다테노 가이(방패의 모임이라는 극우조직)의 멤버 4명과 함께 육상 자위대 동부 방면 총감실에 난입하여 자위대의 궐기와 천황제의 부활을 주창하다가 호응을 못 받자 그 자리에서 일본도로 할복 자살하고 말았다. 그는 소위 훌륭한 할복을 했는데(그의 제자가 할복 후 목을 쳐 주었다), 1960년에 발표된 <憂國>이라는 책에서도 그가 할복할 어떤 암시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생전에도 꾸준히 보디 빌딩을 통해서 몸을 가꾸어 왔다고 하는데, 이것도 훌륭한 할복을 하기 위한 준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당대 최고의 지성이란 작자가 저 지경이니..

6. \'칼\'의 문화

칼이 있으면 누군가를 베게 되고 권총을 차고 있으면 누군가를 쏘게 되기 마련이다.

일본인들은 일본도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일본도를 만드는 장인은 인간 문화재로 높은 대우를 받고 있다. 이 일본도로 일본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아시아, 유럽, 미국을 비롯하여 일본인들(특히 일반 백성들)까지 수 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고 배를 갈랐으며 사지를 잘라낸 것이다.

일본에 이런 옛날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하루는 한 사무라이 아들이 상점에서 떡인지 과자인지를 훔쳐 먹었다고 한다. 상점 주인이 이 사실을 그 사무라이에게 항의하였다. 그러자 노한 사무라이가 말하길, \"너는 너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만약 나의 아이가 너의 상점에서 떡을 훔쳐 먹지 않았다면 너의 목숨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말을 마친 사무라이는 그 즉시 자기의 칼을 빼들고 자기 아들의 배를 갈라서 아들의 위속에 떡이 없음을 증명해 보이고, 그 상점 주인의 목을 베어 죽여 버렸다\'고 한다.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애비가 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제 아들의 배를 가를 정도로 냉혹한 인간들이 사는 곳이 일본이라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저런, 미친 넘들...

이러한 일본도는 우리 나라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데에도 쓰였고, 태평양 전쟁에는 그야말로 일본도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중국의 어느 마을에서는 갓난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공중으로 힘껏 던진 후 떨어져 내려오는 그 아기를 칼로 찔러 죽이고 주위의 동료 병사들은 이를 구경하며 손뼉을 치고 좋아했다고 한다. 물론 그 아주머니가 얼마나 비통해 했는지는 모두들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731부대를 위시한 중국 각지에서의 잔인한 인체 실험, 남경의 민간인 대학살 등 과거 제2차 대전 당시의 일본의 잔인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광적으로 잔인하고 엽기적인 정신병자들...

7. 일본인의 친절

그러나 그런 잔인성에 점차 무감각해질 정도로 현재 개개인의 일본인들은 친절하고 상냥하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일본인이 어떻게 세계에서 알아줄 정도로 서비스정신이 투철한 민족일 수 있을까? 그것은 위에서 잠깐 얘기한 바와 같이 일본이 숭상한 칼의 문화는 일반 백성과는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즉 칼의 문화는 사무라이들 중심이었지,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 칼이 두려움과 존경의 상징이었다.

알다시피 일본은 오랜 세월 동안 칼잡이(사무라이)들이 지배해 온 \'칼의 나라\'였다. 이것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구조가 칼을 찬 자와 칼을 찰 수 없는 백성들로 간단히 양분된다는 것도 말한다. 우리나라도 양반과 상놈(일반 백성)으로 나뉘었지만 그 의미는 무척 달랐다. 우리나라는 백성들이 조금 잘못했다손 치더라도 기껏해야 곤장이나 몇 대 맞으면 될 일이 일본에서는 사무라이의 칼에 목이 날아가는 판이었다.

즉, 일본의 백성들은 사무라이들을 대단히 무서워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인들은 무서운 칼 때문에 착하게 길들여 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특히 혼네(속마음)과 다테마에(겉표현)가 다른데, 이 이중구조적인 일본인의 태도표현은 칼이 무서워서 생겨난 것이다. 자기보다 강한 상대방이나 강력한 쇼군의 밑에서 미움을 안받고 살아가려면 속마음은 다를지언정, 우선 면전에서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단칼에 목이 떨어질 수도 있고 할복을 명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좀 더 생각해 봅시다\'와 같은 말을 했으면 했지 면전에서는 좀처럼 \'No\'라고 말하지 않는다. 무서운 사무라이 앞에서 감히 반대의견을 나타내었다 가는 즉각 목이 날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절 잘하기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일본인들은 뒷걸음 치면서 상대방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절을 한다. 이것은 인사를 하고 난 후, 상대편 사무라이가 칼을 빼어 돌아서는 등이라도 내려칠까봐 그랬던 것 같다. 어쨌든 칼을 찬 사무라이들은 그 자리에서 언제든지 일반 백성들에게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에 대한 사무라이들의 이 즉결처분은 거의 대부분 상부로부터 용인되었다. 그러니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칼에 의해서 착하게 길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면 사무라이들은 착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들도 역시 착했다. 그러나 자기보다 상급의 사무라이나 영주에게는 아주 착했으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즉 강한 놈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고, 약한 놈 앞에서는 포악무도해지는 이중 성격..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이 일본에 진주하였을 때, 맥아더사령관이 가장 염려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고 한다. 소위 \'천황폐하\'의 이름으로 내려진 정종 한 잔을 마시고 낡은 비행기를 몰아 항공모함에 돌진하던 자살특공대(카미가제)에 경악했던 미군들은 그들이 일본열도에 진주했을 때 1억이 넘는 일본인들이 모두다 죽겠다고 결사항전을 한다면 적어도 수천수만의 미군병사들이 목숨을 잃게될 것이라 생각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일본인들은 미군들 앞에서 순한 양이 되어 무엇이던 시키는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것에 너무도 놀랐다고 한다.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포악하고 잔인할 수가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바로 일본인들의 2중 성격, 일단 승패가 결정되고 강자가 확인되면 무조건 무릎 꿇고 곧바로 순종하는 이들이 바로 일본인들인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이런 착한 일본인들은 어찌 보면 단순무식으로 비춰진다. 이는 곧 절대강자 앞에 어느 한 순간에 바로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므로, 슬슬 우리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일본 극우파들의 등장과 이들의 지도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일반 백성들의 심리가 합해진다면 다시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길을 동경하며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위협하는 \'깡패국가\'로 거듭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여간 이런 넘들과 이웃한 것이 우리의 불행이야.


8. 부록 : 시대별로 본 할복의 특징

ㆍ고대
일본 최초 신의 할복은 713년 경의 <하리마풍토기>에서 발견되는데 \'여신이 남편을 쫓아왔다가 분에 못이겨 자신의 배를 가르고 연못에 뛰어 들었는데 지금도 그 연못에 사는 붕어들은 내장이 없다\'고 기록되어있다. 일본 최초 인간의 할복에 관한 기록은 속고사담(續古事談)에서 발견된다. \'친구의 배반으로 잡혀가게 된 후지와라가 분함을 못 참고 군사들 앞에서 배를 가르고 창자를 드러내 그것을 그들에게 던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자신의 배를 갈라서 내장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행하여졌다.

ㆍ중세
고대의 할복보다 그 동기와 의미가 훨씬 많이 첨부되어 나타났다. 이 당시는 할복이 무장의 용기와 인내의 표현으로 그 당시 소설 <기케이키(義經記)>에, 주인공이 \'할복의 상처가 클수록 무장으로서 칭송받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칼로 왼쪽 가슴 밑을 찌르고 세가닥으로 갈라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대의 할복 방법은 할복한 후 내장을 드러내는 일반적 형태와 \'一자\'형과 \'十자\'형, 세가닥으로 가르는 형태였다.

ㆍ근세
이 시기는 무사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자살방법으로 할복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근세 할복의 특징은 무사들에게 나타났고, 무사들의 할복은 순사(주인을 따라서 죽음)와 형벌의 2가지 의미로 행해졌다. 이 시대의 할복 방법은 할복후 내장을 드러내는 행위는 사라지고(내장표출이 집행인에 대한 반발이라고 인식하였으므로) 배를 가르지 않는 할복의 처형 즉 할복 준비를 하고 칼을 집기 위해 손을 내밀어 목이 앞으로 내밀어졌을 때 대기하고 있던 かいしゃく(카이샤, 자살도우미)가 목을 쳤다.

ㆍ근대
서구문명의 정착과 총, 대포의 발달로 할복자의 수는 줄었지만 여전히 행하여졌다. 대표적 인물로는 노기마레스케(당시 천황이 죽자 할복했는데 천황에 대한 충정을 나타내는 숭고한 죽음으로 지금까지 높게 평가되고 있음)와 아나미고레치카(패전의 책임을 지고 할복한 상징적 인물)가 있었다.

ㆍ현대
가장 최근에는 1970년에 극우주의자 미시마유키오(三島由記夫 : 1925 ~ 1970 소설가, 극작가)가 천황중심제의 부활을 주장하며 할복한 기록이 있다. 그 이후로는 잔인무도한 할복자살의 기록은 없지만, 일본의 \'조폭\' 야쿠자들 사이에는 잘못을 저지른 부하가 할복을 대신하여 손가락을 한 마디씩 잘라서 오야붕에게 바치는 관습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것 역시 할복에는 못 미치지만 잔인무도하고 섬찍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새끼 손가락의 마지막 마디부터 자르는데, 실수가 많은 야쿠자들은 점점 손가락 마디가 줄어 들어들겠지. 하여간 미친 넘들이야...

9. 결언

일본인들의 할복은 자살이라는 이름을 빈, 강요된 살인이다. 할복은 그 잔인성과 야만성을 통해 일반 백성들에게 끔찍한 공포를 불러 일으켜 권력자들에게 충성을 다하게 한 통치술이라고 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들의 광적이고, 엽기적이며 야만적인 행위는 문명사회에서는 결코 허용될 수도ㆍ허용되어서도 안되는 범죄행위일 뿐인 것이다.

한ㆍ일 월드컵을 공동개최하는 우리로서는 포악하고 잔인한 \'칼\'의 정서를 지닌 이들을, 우리 선조들의 전통인 선비문화와 \'붓\'의 정서로 감싸안아야 성공적인 대회를 치러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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