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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룡의 꿈 [이성주의 건강편지]
부귀영화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너간 투사들
어젯밤 사무실에서 일하다 머리를 식히려고 TV 채널을 돌리다가 리모컨을 멈췄습니다. KBS1에서 ‘자유인 이회영’이라는 5부작 드라마를 내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건강편지에서 몇 차례 독립투사의 삶을 알리는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하는 것을 제안했기에 반가웠습니다. 저는 공영방송이 이런 프로를 많이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국권을 빼앗기자 형제들과 가족회의를 열고 오늘날 가치로 수 백, 수 천 억 원에 해당하는 돈을 갖고 압록강을 건넜던 지사입니다. 우당의 6형제 가족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뿔뿔이 흩어져서 조국 독립을 갈망했습니다. 그 중에는 굶어죽은 사람도 있었지요. 드라마의 후기에서 몇 년 전 작고한, 우당의 아들이 “하루 한 끼를 겨우 먹어 배가 고팠지만 아버지에게 배고프다는 얘기를 못했다”고 말하는 대목이 아직 귓전을 울리는군요. 퉁소를 불면서 배고픔만 싸우던 그 모습이 그려지고요.
1990년 오늘(9월 13일)은 우당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한 독립투사 5위의 유해가 봉환된 뜻 깊은 날입니다. 석주는 99칸 가옥이었던, 고성 이씨의 종택 임청각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는 안동 양반으로 편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우당과 마찬 가지로 옳지만 힘든 삶을 선택했습니다.
석주는 구한말 의병항쟁에 참여했지만 한계를 깨닫고 “시세에 어둡기 때문에 일본에게 당했다”며 동서양의 책들을 섭렵했습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인 50세에 칸트, 홉스, 루소 등의 책을 읽고 노비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종들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는 1911년 신민회가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고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은 다음 식솔 5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이 때 유명한 거국시(去國詩)를 남깁니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는데/살은 깎여도 참을 수 있고/창자는 끊어져도 아프지 않다. //그러나 내 밭, 내 집을 빼앗고/또 다시 내 처자를 넘보니/차라리 이 머리가 잘릴지언정/내 무릎 꿇어 종이 되겠는가.”
석주는 우당 형제와 함께 독립군 양성에 온몸을 바쳤고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맡아 분열된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독립투사의 길은 정말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석주의 손자며느리 허은 여사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는 애국지사들의 뼈아픈 고충이 절절히 기록돼 있습니다. 고향에서는 양반이라서 손에 흙을 묻히는 것을 생각지도 않았지만 간도에서는 화전농사를 지으며 생존을 걱정해야 했지요. 도랑물을 식수로 사용하다 돌림병으로 온 마을이 쑥대밭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제의 추격을 피해 한 해 5, 6번 굶주린 배를 쥐고 기약 없이 이사를 해야 했지요. 고픈 배를 부여잡고 숨진 가족을 보는 것은 또 얼마나 참담한 일이었겠습니까?
석주는 1932년 신흥무관학교 교장과 대한독립군단 참모총장이 마적들에게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곡기를 끊고 한탄하다가 기력을 잃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말입니다. “더욱 힘써서 늙은 사람이 죽을 때의 소망을 저버리지 말라. 우리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성실뿐이다. 진실로 참다운 성실이 있으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함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20년 전 오늘 그 석주 선생이 돌아온 날입니다. “슬퍼말고 옛 동산을 잘 지켜라, 나라 찾는 날 다시 돌아와 살리라”는 고별시를 남기고 임청각을 떠난 지 79년 만에 고국을 찾은 것이지요.
이 뜻 깊은 날, 건강한 정신에 대해 생각에 잠깁니다. 재물과 승부의 노예들이 너무나 많은 오늘, 삶의 가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석주 선생이 숨을 거두면서도 놓지 않았던 성실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도, 절실한 소망에 대해서도.
=======================
대한제국의 고관대작을 지내다가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15만원(당시 금액이니, 오늘날 15억원 정도는 되지 않을까?)을 받고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같은 매국노들도 있지만, 자신의 전재산 200만원을 아낌없이 내어놓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한 애국자분들이 계시기에 오늘날 이 땅의 자유와 민주주의와 번영이 가능하였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어젯밤 사무실에서 일하다 머리를 식히려고 TV 채널을 돌리다가 리모컨을 멈췄습니다. KBS1에서 ‘자유인 이회영’이라는 5부작 드라마를 내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건강편지에서 몇 차례 독립투사의 삶을 알리는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하는 것을 제안했기에 반가웠습니다. 저는 공영방송이 이런 프로를 많이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국권을 빼앗기자 형제들과 가족회의를 열고 오늘날 가치로 수 백, 수 천 억 원에 해당하는 돈을 갖고 압록강을 건넜던 지사입니다. 우당의 6형제 가족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뿔뿔이 흩어져서 조국 독립을 갈망했습니다. 그 중에는 굶어죽은 사람도 있었지요. 드라마의 후기에서 몇 년 전 작고한, 우당의 아들이 “하루 한 끼를 겨우 먹어 배가 고팠지만 아버지에게 배고프다는 얘기를 못했다”고 말하는 대목이 아직 귓전을 울리는군요. 퉁소를 불면서 배고픔만 싸우던 그 모습이 그려지고요.
1990년 오늘(9월 13일)은 우당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한 독립투사 5위의 유해가 봉환된 뜻 깊은 날입니다. 석주는 99칸 가옥이었던, 고성 이씨의 종택 임청각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는 안동 양반으로 편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우당과 마찬 가지로 옳지만 힘든 삶을 선택했습니다.
석주는 구한말 의병항쟁에 참여했지만 한계를 깨닫고 “시세에 어둡기 때문에 일본에게 당했다”며 동서양의 책들을 섭렵했습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인 50세에 칸트, 홉스, 루소 등의 책을 읽고 노비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종들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는 1911년 신민회가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고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은 다음 식솔 5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이 때 유명한 거국시(去國詩)를 남깁니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는데/살은 깎여도 참을 수 있고/창자는 끊어져도 아프지 않다. //그러나 내 밭, 내 집을 빼앗고/또 다시 내 처자를 넘보니/차라리 이 머리가 잘릴지언정/내 무릎 꿇어 종이 되겠는가.”
석주는 우당 형제와 함께 독립군 양성에 온몸을 바쳤고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맡아 분열된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독립투사의 길은 정말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석주의 손자며느리 허은 여사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는 애국지사들의 뼈아픈 고충이 절절히 기록돼 있습니다. 고향에서는 양반이라서 손에 흙을 묻히는 것을 생각지도 않았지만 간도에서는 화전농사를 지으며 생존을 걱정해야 했지요. 도랑물을 식수로 사용하다 돌림병으로 온 마을이 쑥대밭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제의 추격을 피해 한 해 5, 6번 굶주린 배를 쥐고 기약 없이 이사를 해야 했지요. 고픈 배를 부여잡고 숨진 가족을 보는 것은 또 얼마나 참담한 일이었겠습니까?
석주는 1932년 신흥무관학교 교장과 대한독립군단 참모총장이 마적들에게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곡기를 끊고 한탄하다가 기력을 잃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말입니다. “더욱 힘써서 늙은 사람이 죽을 때의 소망을 저버리지 말라. 우리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성실뿐이다. 진실로 참다운 성실이 있으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함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20년 전 오늘 그 석주 선생이 돌아온 날입니다. “슬퍼말고 옛 동산을 잘 지켜라, 나라 찾는 날 다시 돌아와 살리라”는 고별시를 남기고 임청각을 떠난 지 79년 만에 고국을 찾은 것이지요.
이 뜻 깊은 날, 건강한 정신에 대해 생각에 잠깁니다. 재물과 승부의 노예들이 너무나 많은 오늘, 삶의 가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석주 선생이 숨을 거두면서도 놓지 않았던 성실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도, 절실한 소망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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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고관대작을 지내다가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15만원(당시 금액이니, 오늘날 15억원 정도는 되지 않을까?)을 받고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같은 매국노들도 있지만, 자신의 전재산 200만원을 아낌없이 내어놓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한 애국자분들이 계시기에 오늘날 이 땅의 자유와 민주주의와 번영이 가능하였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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