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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0491

구태익 | 2002.02.28 01:01 | 조회 3174
진시황제는 재위동안에 정치, 경제 산업 등에 힘써 국가를 부강하게 하여 중국을 통일
한 최초의 황제이다. 그의 찬란한 업적의 전개는 그의 출생부터 시작되는듯 하여 우리
에게 자못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기원전 260년 한(韓)나라(지금의 하남성)의 적양성에 여불위(呂不偉)라는 상인이 있었
다. 여러 나라를 떠돌아 다니며 장사를 하던 그는 진나라의 태자 안국군(安國君 : 나
중에 효문왕이 됨)의 아들 자초(子楚)가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限鄲)에 인질로 잡
혀 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참고로 안국군에게는 자초 말고도 20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
는데, 자초의 어머니 \'하희(夏姬)\'는 안국군의 총애를 받지못했고, \'희첩(姬妾)\'이라
는 여인을 사랑하여, 이 여인을 정부인으로 세워 \'화양부인(華陽夫人)\'이라 불렀다.

그는 자초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접근하여 교분을 맺고, 조나라의 인사들과 폭넓은 교제
를 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해준다. 그러면서도 자초를 이용하여 정치적으로 출세
할 목적으로 안국군의 부인들 가운데 가장 총애하는 화양부인에게 자식이 없음을 간파
한 그는 화양부인에게 자초의 이름으로 진기한 선물공세를 던진다.

이로 인하여 진나라에서 잊혀져 가던 자초의 이름이 화양부인의 기억에 되살아나고 주
목을 받게 된다. 여불위는 진나라 궁정의 여론을 자초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궁정
대신들을 매수하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조성으로 자초는 자식이 없던 화양부인의 적자
(嫡子)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이미 왕위를 이어받게 되어 있던 장남 자계(子系)를 제
치고 자초가 후계자가 된다.

한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는 자초를 진나라의 후계자로 만든 여불위는 그의 애첩 조희
(趙姬)까지 바치어 더욱 환심을 샀다. 자초가 주희와 함께 진나라로 돌아간 후 아들
을 낳았으니, 이 아이는 여불위가 조희를 첩으로 삼았을 때 이미 잉태된 씨앗이었으
며 그가 훗날 진시황제가 된다.

자초는 안국군(효문왕)의 뒤를 이어 장양왕(將襄王)이 되고 여불위는 승상에 임명된
다. 그러나 3년후 자초는 병으로 죽고 기원전 246년에 열세살의 어린 나이에 그의 아
들 영정(瀛正)이 왕위에 오르자 여불위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진시황의 어머니(조희)는 태후가 되고 난 뒤에도 여불위와 남몰래 간통을 즐겼
고, 이에 불안을 느낀 여불위는 계략을 꾸며 음경이 큰 \'노애(전설적인 변강쇠와 흡
사)\'를 태후에게 바쳐 궁중에 봉직시키며 마음껏 간통할 수 있게 하고(이 여인도 참
대단합니다) 여불위 자신은 그 굴레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노애가 실제로 환관이 아님이 밝혀지고 이 사건에 여불위도 연루되어있음을 진시황이
알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진시황은 노애의 삼족은 물론 노애와 태후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도 모두 죽이고 태후도 귀양을 보냈으며, 여불위도 상국의 자리에서 파면시키고 변방
으로 추방시키자 여불위는 스스로 독약을 마셔 목숨을 끊는다. 이때 여불위는 독약이
든 약사발을 들고, 말 못할 희열에 차 파안대소하며 흔쾌히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모든 야심을 이루고, 그의 마지막 소망인 천하통일의 큰 뜻을 아들이 완성할
수 있도록 스스로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 이듬해 23세에 대관식을 거행하여 왕위에 오르며 명실상부하게 왕의 권좌에 오르
게 된 진시황(물론 이때는 아직 시황제라는 시호를 쓰지 않았다)은 비정상적인 자기
의 출생내력이 백성들에게 회자되는 것을 꺼려 자기관리에 더욱 충실하고 정치도 잘하
려 하였다.

진시황은 기원전 230년과 221년 사이에 한(韓), 조(趙), 위(魏), 초(楚), 연(燕), 제
(齊)등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이때부터 진시황제는 첫번째 황제라는 뜻에서 시황제(始
皇帝)라 는 칭호를 붙이며 자기의 위세를 온 천하에 과시하게 되었다. 황제라는 뜻은
원래 하느님(上帝)과 삼황오제(三皇五帝)로 부터 나온 뜻으로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다
는 것을 일컫는다.

진시황은 재위 중에 상앙(商秧)을 등용하여 도량형 표준기를 제정하고 법률제도를 획
일화하면서 중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후 여불위가 보좌하던 자리를 순자(筍
子)의 제자였던 이사(李斯)를 등용하여 서법(書法)의 통일등으로 중앙 집권적인 국가
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진시황은 초원지대의 유목민들로부터 국경을 지키기 위해 전국시대의 북방국가들이 쌓
았던 성들을 연결시켜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이 길이는 감숙성의 서남쪽에서 시작하
여 몽고 남단을 따라 남만주까지 이어지는 3,500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장벽이 되
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로 이끌어 나가는 이면에는 국민들의 원성도 점점 높아져 난으로
이어졌다. 진시황이 통일국가를 이룩한 업적은 지금의 중국에서도 높게 평가되고 있으
나 짧은 기간동안 백성들을 폭정에 시달리게 하고 분서갱유로 인한 사상의 공백기를
가져온 것은 실책으로 지적되고 있다.

진시황제의 생애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의 연속이었고 그의 정복욕은 죽음까지 정복하
려고 불사약을 구할 정도로 극치에 달하였다. 이를 역사학자들은 진시황이 마시던 술
잔의 납성분이 녹아나 납중독에 의해 정신질환이 생겼다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불로초
를 구하기 위해 보낸 서불(西弗)과 그 일행은 우리 나라 제주도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즉, \'서귀포(西歸浦)\'는 서불일행이 여기까지 왔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뜻을 가
진 포구이며, 실제로 서귀포 앞바다의 차귀도(此歸島, \'차귀\'는 \'여기서 돌아갔다\'는
뜻) 바위에는 \'西弗過此(서불과차, 서불이 여기를 지나갔다)\'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진시황의 죽음에 대한 도전도 허망하게 끝나 겨우 50세에 세상을 뜨니 시황제
라고 칭한지 12년만의 일이었다. 진시황이 죽은 후 진나라는 황실의 후계자를 둘러싼
다툼으로 폭정에 항거하는 농민들의 난으로 4년동안 혼란에 빠지다가 멸망하였다.

(http://www.centerworld.com/acad/prof/shim/cyber/05_1.htm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본문내용을 추가ㆍ편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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