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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005

구태익 | 2002.12.05 01:01 | 조회 2756
전통 솟을대문으로 복원된 한옥 : 2002년 11월26일(화)

풍산류씨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내력

풍산 류씨는 고려말 호장을 지낸 휘 절(節)을 시조로 한다. 이 분이 지금의 풍산읍 상
리에 살다가 7세 공조전서(工曺典書) 류종혜(柳宗惠)공에 이르러 하회 큰고개(大峴)밖
에 집을 지었다. 공은 이곳에서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공덕을 베풀었다. 삼년 동
안 은혜를 입은 사람이 많았다.

이를 기반으로 허씨와 안씨들이 살고 있는 곳을 피해 울창한 숲을 베어내고 늪지대에
흙을 넣어 터를 닦아 집을 짓기 시작하여 몇 해만에 대저택을 지으니 지금의 양진당
(養眞堂) 사랑채가 그 당시 건물의 일부라고 전한다.

조선 초엽에 이름난 마을인 하회, 그것도 이미 다른 씨족들이 터를 잡아 살고 있는 마
을에 혼인이나 다른 특수한 인연이 아닌 상태로 진입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는지 모
른다. 또한 잦은 자연재해와 숲이나 늪과 같은 제반 장애물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
다.

입향조인 공조전서는 하회 화산 꼭대기에 올라 하회마을을 면밀히 관찰했다. 물의 흐
름이나 산세며 기후조건 등 주도면밀한 검토였다. 하회의 뒷산인 화산은 명산(名山)이
라고 한다. 주변의 산들과 비교해 보아도 그 규모면에서 으뜸이며 또 강을 끼고 하류
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물을 거슬러 다시 올라오는 형세를 취하고 있다. 이를 역수
형(逆水形)이라 하는데, 풍수지리적 측면에서는 대단히 좋은 기상인 모양이다. 또 하
나, 화산은 산이 겹으로 두텁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사방으로 움
직이며 화산을 보면 참으로 천가지 만가지 모양을 볼 수 있다.

가장 인상 깊은 곳은 병산서원 앞 산 정상에서 바라본 것인데, 꿈틀거리는 한 마리의
용이 생각날 정도이다.

화산 정상에서 오랜시간을 조망(眺望)한 끝에 천년기지로 택한 입향조는 지금의 양진
당 터에다 곧 바로 살 집을 지었다. 형편이 넉넉했던 터라 비교적 규모가 큰 집을 경
영했던 모양이다. 그 집은 지금의 큰 종가인 양진당을 말하는데 뜻밖에도 기둥을 내세
우면 넘어지곤 하기를 수차 반복하게 되자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하루는 곤히 자는데 산신령이 현몽(顯夢)하기를, \'그곳은 네 터가 아니다. 굳이 네 터
를 만들려면 삼년동안 활만인(活萬人)을 하도록 하여라\' 라고 하였다. \'활만
인\'
, 즉 만명의 사람들을 구원해 주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산신령의 주문이었다.

그러나 집을 짓기 위한 집념도 만만치 않아 지금의 큰고개 밖(峴外)에다 원두막과 같
은 보잘것 없는 집을 마련하고 여름이면 밭에 외도 갈아 오가는 이들에게 먹이고 짚신
을 삼아 길손들에게 주기도 하고, 가마솥에 밥을 지어 가난하고 굶주린 행인에게 대접
하는 등 지극 정성으로 삼년동안 만여명에게 공덕을 베푼 뒤 기둥을 세우니 현몽한대
로였다는 전설이다.

류씨가 하회에 정착한 이후 입암(立巖), 귀촌(龜村), 권옹(倦翁), 파산(巴山) 등 이름
난 관리와 걸출한 선비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조선 중기의 위대한 성리학자인 겸암(謙
菴)선생과 임진왜란 당시 난리를 다스린 재상으로 \'산하재조지공(山河再造之功)을 세
운 서애(西厓) 선생 형제분이 나셨다. 두 분 모두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고제(高
弟)로서 영남학파의 거봉이 되었다.

http://anu.andong.ac.kr/~shryu/hahoes.html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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