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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004

구태익 | 2002.12.05 01:01 | 조회 1608
하회마을 안내판 앞에서 열심히 설명을 해주시는 가이드 : 2002년 11월26일(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오든 열 사람이 오든 하회마을을 열심히 설명해
주는 가이드의 열의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하회마을의 모둠살이는 낮은 구렁 형태의 골을 따라 주택들이 옹기 종기 모여있고 완
만한 자연경사와 삼면을 감싸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로 인해 동서남북으로 좌향을 제각
기 잡고 있어 여느 마을에서는 보기 드문 가옥배치를 보여준다. 마을의 주택 좌향
을 \'제각기\'나 \'동서남북 사방\'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더욱 적절한 표현은 \'24방
위\'일 것이다. 학문이 있고 문화를 아는 사람들이 무수히 배출된 마을이 양반마을, 하
회이므로 학문과 문화적 안목을 바탕으로 한 자연과의 조화가 그것이다. 그 조화가 각
양 각색의 가옥의 좌향과 형태의 구조를 결정했다고 본다. 삼면을 감싸 흐르는 강을
바라보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마을 안에는 웅장한 고기와집과 솟을대문 그리고 정감 어린 초가집들이 지어져 전통마
을로 손색이 없는 풍산(豊山) 류씨(柳氏) 총본산일 뿐 아니라 강산의 수려함으로도 국
내의 제일이다.

하회마을은 \'허씨(許氏) 터전이며 안씨(安氏) 문전(門前)에 류씨(柳氏) 배반(胚盤)
이라\'는 전설
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또한 가장 명쾌한 마을 역사이기도 하
다. \'배판\'으로 더욱 많이 불려진다. 하회마을에 대한 글을 쓴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단골로 인용하는 문구이다. \'터전\'은 모두가 아는 뜻이며, \'문전\'의 경
우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배반\'은 다르다. 혹자는 믿음과 의리를 저버림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전에 살던 성씨를 몰아내고 하회를 차지하기 위해 그들을 배반했
다는 등. 그러나 전혀 그런 뜻이 아니고 \'배반\'이란 알의 노른자 위에 희게 보
이는 원형질로서 조류나 파충류의 몸체를 만드는 중요한 부분을 말한다. 곧 안씨와 허
씨들이 마을의 기초공사를 했다면 그곳에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씨족은 류씨라는 말
이다. 하회는 류씨의 명당(明堂)이란 표현이 적절하다.

고려말에 정승을 지내던 김해(金海) 허씨(許氏) 한 분이 조정에서 물러나 팔도의 경
치 좋은 곳을 유람하다 안동을 경유하게 되었다. 하회의 터가 너무나 좋은 나머지 웃
골 거먹실(남산 팔선대 맞은편 지역)에 살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강 건너 건짓골
(乾池谷)에 허정승의 묘소가 있어 자손인 김해 허씨들이 묘소를 찾아왔었다. 하회탈
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허도령 역시 김해 허씨이다.

허씨들이 터를 잡고 산지 백년 뒤 광주(廣州) 안씨(安氏) 안성이란 분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각 고을을 순시하던 중 하회에 와서 보니 산수가 너무나 좋아 화산 기슭 향
교골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했다. 천곡(泉谷) 안성(安省)이란 분의 아들 안종생(安從
生)은 사헌부 감찰까지 지냈는데 배소(裵素)의 사위이기도 하다. \'광주안씨대동보\'에
의하면 안성은 전서공(典書公, 류종혜)과 동시대 인물이기 때문에 전서공이 고개 밖
(峴外)에 터를 잡던 시기와 같은 때에 하회에 와서 살기 시작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안씨는 하회에 들어와 35대까지 내려왔다는 것만 보아도 그 역사가 유구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마을 근처에 안씨 묘소들이 산재해 있으며 삼십년 전까지 한 집이 남아
있다가 떠난 뒤로 지금은 한집도 남지 않았다.

\'안씨들이 피를 천석이나 했다\'는 말도 전한다. 부용대로부터 부계(富溪)쪽으
로 만여평이나 광활하게 펼쳐진 농토에서 수확된 것으로 추정된다.

풍산 류씨들이 입촌하여 점차로 번성하게 되자 허씨들이 먼저 한 두집 떠나고 이어서
광주 안씨들이 뒤를 이었다. 그리하여 하회마을은 류씨 집성촌으로 자리잡으면서 대촌
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보여진다. 풍산 류씨들이 하회에 자리를 잡으면서 얼마
안되어 벼슬길이 열렸다. 중종대에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1515~1573)은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고, 이분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바로 겸암 류운룡
(1539~1601)과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이다.

하회는 옛부터 삼백여 대촌(大村)이라 불려왔다. 이것은 하회 1, 2동을 합해서 부른
말이다. 갑술년(1934) 대홍수에 유실되어 현지는 본동에 120여호에 류씨는 70여호 정
도이다.

http://anu.andong.ac.kr/~shryu/hahoeh.html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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