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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화가 이중섭에 대하여

구태익 | 2001.11.10 01:01 | 조회 1542
현대 한국 미술이 낳은 천재 화가 이중섭(李仲燮 : 1916 ~ 1956, 호는 대향)

이중섭은 우리 나라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되어 경찰은 물론, 초등학교 교사까지
칼을 차고 활동했던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났다. 지주였던 아버지
이희주와 안악 이씨로만 알려진 어머니 사이의 2남1녀 중 막내였으며, 집안은 매우 부
유했다.

중섭은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위로는 열두 살 차이 나
는 형과 다섯살이 많은 누나가 있었다. 초등학교를 들어갈 무렵 평양의 중등학교에 다
니던 형을 따라온 가족이 평양으로 이사를 했다. 평양의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간
중섭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그러나 갯가에서 떠 온 진흙을
여러 모양으로 빚기를 즐겼다. 또 외가에서 사촌들과 함께 사과 한 개씩을 받았을 때
이를 구석으로 가지고 가서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난 뒤에 먹었다. 이처럼 만들기와
그리기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공부에는 뜻이 없었다. 방학 때 일본으로 유학 갔던 형
이 왜 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면 광 같은 곳에 들어가서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진다.

한편 이 무렵 평양은 중섭의 친한 친구 김병기의 부친인 김찬영, 김관호 등 유명 화가
들이 전시회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어 중섭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날
이 갈수록 그림 그리기에 관심을 갖게 된 중섭은 고학년이 되면서 학교에서 \'그림\'이
라고 하면 손꼽히는 아이가 되었다.

오산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 중섭은 이 학교에서 스승 임용련 선생을 만나 재능을 활
짝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임용련은 미국과 프랑서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인재였다. 주말이면 야외 사생 등을 통해 개성과 자유로움을 가르친 임용련 선생 아래
서 중섭은 저항 정신과 민족적 화풍을 익혀 나갔다.

오산학교를 마친 중섭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가 미술 공부를 계속했다.
학교를 다니던 때인 1938년 공모전에 입상하면서 이중섭은 일본 평론가들로부터 주목
받는 인물이 되었다. 1940년 졸업 후에도 일본에 머물며 작품 제작에 몰두한 끝에 서
울 전람회에 출품한 <서 있는 소> 등이 국내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다.

이 무렵부터 중섭은 일본인 마사코를 사랑하게 되었다. 방학 때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개성박물관을 다니며 스케치에 몰두하는 한편, 그림을 그린 엽서를 마사코에게 보내
기 시작했다. 일본에 유학 중인 화가들을 모아 <조선신미술가협회>를 만들어 활동하
던 중섭은 1943년 원산에 돌아와 해방되던 해인 1945년 4월 일본인 마사코를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내로 맞아들였다. 아내의 이름은 한국 이름인 이남덕으로 바꿨다.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기 위해 교사 생활도 마다한 중섭은 소를 하루 종일 관찰하다가
소 주인에게 고발당하기도 했다.

전쟁은 이중섭에게도 많은 관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형이
처형당하고, 10월에는 살던 집마저 폭격으로 부서지자 가족과 함께 빈손으로 월남을
감행했다. 부산과 제주도를 전전하는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이중섭은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부인과 두 아들이 일본인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일본인 송환선을 타
고 친정으로 돌아감에 따라 외로운 생활을 해야 했다. 이 때부터 가족에게 그림 편지
를 보내는 일을 계속했다. 담배를 포장하는 은박지에 그린 그림들은 대부분이 가족을
소재로 한 것으로, 그가 얼마나 가족을 그리워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1953년
일 주일 동안의 일본 방문을 통해 가족을 만났던 중섭은 다시 부산과 서울, 대구 등
을 전전하며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가 1956년 9월 6일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
다가 세상을 떠났다.

은박지 그림과 황소 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은 세계적인 화가로 손꼽히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이처럼 우리 나라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천재화가 이중섭은 1916년에 태어나 1956년에
죽었다. 따라서 그의 생애는 불과 40년 정도에 불과하였는데, 그나마도 일상이 되어버
린 지긋지긋한 가난과 전쟁, 가족의 생이별 등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견디기 힘든
한 시대를 불꽃같은 예술혼을 꽃피우다 사라져간 \"한국의 빈센트 반 고호\"라 할 것이
다. 그의 화풍(畵風)은 그 시대 이전에 보지 못했던 단순화된 형식과 선명한 원색적
색채, 그리고 과감한 필촉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
는 강인한 민족혼을 상징한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이 소년상이다. 단독적인 소년상보다는 다른 물
체와 관련 속에서 표현되었는데 그들의 움직임은 굉장히 유동적이다. 그것을 주제로
삼은 것은 1950년대의 전쟁속에서 그의 두 아들과의 이별과 더불어 많이 그려졌다.
그것은 두 아들에게 대한 애정 표현이었던것 같다. 그 다음으로는 소의 그림인데 소는
그가 살아 있을 당시 우리 민족의 상징이라 여겨졌다. 그리고 풍경화는 주로 그가 피
난시절에 머물고 있던 충무(통영)와 제주도의 풍경들이다. 현실의 가혹함을 벗어나서
꿈꾸는 것같은 평화로운 마을에 정착시키는 것이 그가 담으려고 한 정신이다. 그는 이
러한 한정된 주제 속에서 수 많은 예술을 표현하였다. 이런 왕성한 작업을 하던 이중
섭의 말년은 인간적인 방황과 자포자기로 힘겹게 끝나고 만다. 술로 인한 각종 병들
과 정신이상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가족을 보지도 못한 채 혼자 쓸쓸히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젊었을 때 많은 사회활동을 하였고 많은 그림을 남겼지
만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라고는 고작 몇 점의 그림이 있을 뿐이다.

(www.korkid.pe.kr/inmul/ 및 www.artpia.pe.kr/html-work/introduction.htm 에서 발
췌ㆍ수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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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씀이나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81 답글 글쎄요... 구태익 1163 2001.11.23 01:01
80 답글 바쁘시지 않다면,, 신정선 1263 2001.11.24 01:01
79 답글 명청원림미학 구태익 1281 2001.11.25 01:01
78 답글 으,,,윽,, 신정선 1315 2001.11.25 01:01
77 황수정사건 : 딴따라는 딴따라일 뿐 사진 첨부파일 구태익 1688 2001.11.19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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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답글 자세한 내용을 주세요 구태익 1348 2001.11.16 01:01
73 답글 졸정원의 신정선 1741 2001.11.17 01:01
72 답글 욕양선억(欲揚先抑)수법 구태익 1905 2001.11.17 01:01
71 답글 감사합니다,,, 정선 1281 2001.11.19 01:01
70 답글 <중국미학사대강>을 보시오... 구태익 1600 2001.11.19 01:01
69 답글 우연히 신정선 1255 2001.11.22 01:01
68 답글 빈 말이 아닙니다 구태익 1191 2001.11.22 01:01
67 눈... 도라지 969 2001.11.14 01:01
66 이 곳에 글올린이가 내가 아는 이재수님인가요? 예쁘니 1175 2001.11.14 01:01
65 답글 맞아맞아.. 구태익 1205 2001.11.14 01:01
64 교수님! 안교수님 졸업생 1263 2001.11.12 01:01
63 답글 답변 : 문화재수리 자격시험에 관해 구태익 1261 2001.11.12 01:01
62 교수님!! 숙제에 마능 도움이 *^-^*강타살앙! 1148 2001.11.12 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