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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에 올라 '天下'를 굽어보다 [중앙일보]

구태익 | 2004.06.04 01:01 | 조회 3476
요즘 \'트레킹(Trekking)\'이란 말이 자주 들린다. 대체로 정상 정복 산행이 아닌 산책과 같은 가벼운 산행을 의미한다. 옛날 아프리카에서 소달구지를 타고 집단 이주하던 것에서 유래했다. 어원만 따지자면 오지 탐험과 같은 모험성 나들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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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트레킹이 최근 우리나라의 레저 트렌드로 떠오른 건 급증한 레저 수요의 영향이 크다. 레저에 대한 욕구는 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지만 정상 정복 산행은 일반인에게 부담이 됐다. 결국 정상을 고집하지 않는 산행 코스가 개발됐고, 오늘날 산행의 주요 테마가 됐다. 트레킹은 역시 코스 자체가 재밌어야 한다. 생태 체험이나 문화 유산 답사 등 다양한 흥밋거리가 있어야 한다. 난이도도 가족 단위 일반인에게 적당해야 한다.

최근 트레킹 명소로 떠오른 곳은 강원 산악지대. 백두대간의 고개와 계곡을 따라 다니는 길이다. 하지만 week&이 이번에 엄선한 트레킹 코스는 서울 한복판에 있다.

인왕산. 600년 동안 서울을 굽어보는 산이다. 동네 뒷산처럼 친숙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1968년부터 26년 동안은 접근 자체가 금지됐던 곳이다. 기막힌 사연들이 이 바위산 곳곳에 숨어 있다. 이번주 week&이 \'인왕산 문화답사 트레킹\'을 떠난 이유다.

글=손민호 기자<ploveson@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choissie@joongang.co.kr>

http://news.joins.com/component/htmlphoto_mmdata/200406/htm_2004060315374960006800-001.JPG align=right hspace=5 border=1>*** 조선의 성지 - 사직단

인왕산 문화유산 트레킹은 사직단(社稷壇)에서 시작한다. 지금은 사직공원이 더 익숙하겠지만 사직단으로 부르길 고집한다. 장충단이 안개 낀 장충단 공원으로, 창경궁이 창경원이 된 것과 같은 이유로 사직단도 공원이 됐다. 지금의 사직단은 흔한 시민공원의 모양새다. 1922년 일제가 벚꽃나무를 심고 의자를 설치한 게 원죄라지만 해방 뒤에도 훼손은 계속됐다. 62년 도시계획 사업을 벌이면서 정문(보물 177호)이 원래보다 14m나 후퇴했다.

사직단은 곡식과 토지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종묘사직(宗廟社稷)\'의 그 \'사직\'이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자마자 사직과 종묘를 세웠다. 좌묘우사(左廟右社)라고 해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을 세웠다. 물론 기준은 왕이 거하는 경복궁이다.

배드민턴장이 있는 공터로 오른다. 사직단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직사각형의 담장 안에 직사각형의 단(壇) 두개가 나란히 있다. 단에는 황토가 봉긋하다. 왼쪽이 국토신(社)을, 오른쪽이 오곡신(稷)을 모시는 단이다. 둘이 합쳐 비로소 \'사직\'이 된다. 흥미로운 건 이 네모의 연속 구조다. 네모는 동양 철학에서 땅을 상징한다. 매년 9월 첫째 일요일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제를 올릴 때만 개방된다.

지금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동상이 서있는 공터는 수영장이 있던 자리다. 일제시대에 들어섰는데 69년 동상을 세우면서 수영장을 없앴다. 이와 관련한 한 가지. 69년 당시는 이른바 동상의 시대였다. 남대문 앞엔 유관순 열사, 시청 앞엔 김유신 장군 등 성현 37명이 동상으로 부활했다. 세종로의 충무공도 마찬가지.

http://news.joins.com/component/htmlphoto_mmdata/200406/htm_2004060315374960006800-002.JPG align=right hspace=5 border=1>*** 발해의 꿈 - 단군 성전

공터 뒤란의 돌계단을 오른다. 이내 환한 미색의 건물이 보인다. 단군 성전. 왜 예서 단군을 모실까 궁금해 사당을 관리하는 현정회에 문의했다. 원래 이 자리는 단군과 관계 없는 사직단의 터였다. 일제가 여기에 암자를 지으면서 사달이 벌어졌다. 원래 단군 신당이 있던 남산의 터에도 일제는 절을 지었다. 60년대 후반 사직단을 복구하면서 단군 사당이 이리 옮겨온 것이다.

여기에 모신 단군 영정은 단군의 표준형 얼굴이다. 78년 문화재 전문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단군의 공식 얼굴이 됐다. 지금 전국의 단군 사당은 80여개. 모두 여기를 모델로 했다. 단군만 모신 것도 아니다. 고구려.백제.신라 등 역대 왕조의 창업주 신위도 있다. 흥미로운 건 발해의 창업주도 모신다는 것. 발해를 한국사로 포용하려는 뜻이 읽혀 반갑다.

단군 성전의 색깔을 둘러싼 논쟁. 현정회 측은 밝은 미색이 신라시대의 전통 양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는 60년대 지은 건물은, 심지어 시골의 면사무소까지 모두 미색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공교롭게도 고(故) 육영수 여사가 좋아한 색깔이 이 미색이란다.

http://news.joins.com/component/htmlphoto_mmdata/200406/htm_2004060315374960006800-003.JPG align=right hspace=5 border=1>*** 화살의 끝은? - 황학정

인왕산 스카이웨이의 인도를 따라 잠시 오르니 오른쪽에 오래된 전각이 보인다. 황학정(黃鶴亭)이다. 왕이 친히 궁술을 연습하던 곳이다. 여기서 알아야 할 건 황학정의 위치. 원래는 경희궁 안에 있었다. 지금의 황학정 자리는 조선시대 궁술 연습장이었던 등과정(登科亭)의 터였다. 위치를 바꾼 건 역시 일제다. 22년 경성중학교를 짓는다며 황학정 터를 철거하고 여기로 옮긴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황학정은 이제 몇 안 남은 경희궁의 본래 전각 중 하나다. 하지만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글씨다.

지금도 여기서 활을 쏜다. 활쏘기를 일절 금지했던 일제는 황학정에서만 허가했다. 해방 이후엔 국궁(國弓)의 구심점이 됐다. 지금은 전국 300여 곳에서 국궁을 할 수 있다. 황학정 사무소(02-738-5784)에서 회원으로 등록하면 국궁을 배울 수 있다. 입회비 30만원, 월회비 3만원(성인 남성 기준). 일부 역사학자가 여기서도 의문을 품는다. 왜 일제가 황학정에서만 활쏘기를 허가했을까. 인왕산 기슭에 서 산아래로 시위를 당겨보니 이내 알겠다. 화살촉은 정확히 경복궁을 향한다.

http://news.joins.com/component/htmlphoto_mmdata/200406/htm_2004060315374960006800-004.JPG align=right hspace=5 border=1>*** 능선에 올라보니

황학정을 지나 왼쪽으로 꺾으면 비로소 등산로가 보인다.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르다 보면 한양 도성을 따라 훤하게 주능선이 펼쳐진다. 특이한 건 등산로가 아스팔트 계단이라는 점. 계단 한가운데엔 형광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야간 순찰을 도는 군인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곳곳이 초소다. 등산로를 조금이라도 벗어났다간 이내 제지를 받는다. 이로 인해 인왕산에서의 조난 사고는 불가능하다. 참고로 이 능선을 따라 부암동으로 내려가는 길엔 약수터가 없다. 물을 미리 준비할 것.

왼편 기슭에 묘하게 생긴 바위가 보인다. 2개의 바위가 중이 장삼을 입고 서있는 것처럼 보여 선(禪)바위라고 한다. 자식 없는 사람에게 효험이 있다고 한다. 무속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바로 옆에 국사당(國師堂)이 있다. 화려하게 치장된 건물은 모두 최근에 올린 암자고, 그 뒤 허름한 전각이 국사당이다. 원래는 태조가 한양의 수호신사로 남산의 8각정 있는 곳에 올렸다. 일제가 그 자리에 조선신궁을 지으며 이리로 옮겼다. 조선신궁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어선 안된다는 게 이유였다.

http://news.joins.com/component/htmlphoto_mmdata/200406/htm_2004060315374960006800-005.JPG align=right hspace=5 border=1>*** 청와대가 바로 저기

정상까지 10분 정도 가파른 산길이 이어진다. 커다란 바위를 타고 올라야 한다. 하지만 안전장치가 튼튼해 위험하지는 않다. 마침내 정상. 오른쪽으론 남산이, 가운데엔 낙산이, 왼쪽엔 백악산이 보인다. 그 옛날 한양 도성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지는 것이다. 백악산 아래 높다란 푸른 기와집은 청와대. 청와대가 발 아래라니. 기분이 짜릿하다.

사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서울 전경은 그리 곱지 못하다. 백악산과 남산 사이를 가로막는 고층 건물이 영 눈에 거슬린다. 옛날 경복궁에선 남산이 훤히 보였을 텐데. 우리네 역사를 망가뜨린 건 비단 일제만은 아니다. 여기에서도 경찰이 근무를 선다. 한달 전쯤만 해도 사진기를 꺼내는 것조차 금지됐다. 하지만 지금은 뭐라 하지 않는다. 하산길을 묻는 등산객에게 친절하게 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http://news.joins.com/component/htmlphoto_mmdata/200406/htm_2004060315374960006800-006.JPG align=right hspace=5 border=1>*** 폐비의 눈물 - 치마바위

정상에서 내려오다 문뜩 뒤를 돌아보면 여인네의 주름치마처럼 생긴 널찍한 바위가 보인다. 치마바위. 내력이 곡진하다. 1506년 연산군의 폭거에 항거해 중종 반정이 일어난다. 당시 중종의 비는 신씨. 문제는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측 사람이었다는 것. 신수근은 중종 반정 때 죽임을 당했고 반정 공신들은 죄인의 딸을 왕비로 삼을 수 없다며 왕비 신씨를 폐한다. 그러나 중종은 옛 왕비가 그리웠다.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의 신씨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이 소식은 궐밖의 신씨에게도 전해졌고, 그는 궁궐에서 입던 붉은 치마를 아침마다 인왕산 높은 바위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그 뒤로 \'치마바위\'라고 불렸다고.


http://news.joins.com/component/htmlphoto_mmdata/200406/htm_2004060315374960006800-007.JPG align=right hspace=5 border=1>*** 도성의 정치학

하산길은 한양 도성을 감상하는 길이다. 아니 엄밀히 말해 인왕산 트레킹은 한양 도성 문화답사다. 정상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면 내사산을 기점으로 도성의 윤곽이 얼추 그려진다. 그 윤곽을 따라 옛날에 성을 쌓았다고 상상하면 맞다. 봉건왕조 조선은 한양 도성을 완공하면서 비로소 완성됐다. 태조 당시 공사에 동원한 인원이 모두 20만명. 당시 서울 인구는 5만명이었다. 당시 총 길이는 5만9500척. 약 18㎞였다.

성벽을 바라보면 시대에 따른 성벽 축조 기술의 변화도 보인다. 숙종 때 개축된 성벽은 돌을 커다란 직사각형으로 조각해 올렸고, 200년쯤 전 세종 때의 성벽은 기존의 돌 모양에 맞춰 끼워넣은 식이다. 박정희 시대에도 성벽을 쌓았다. 사직단에서 오르는 길 왼편의 성벽이 그것이다. 비무장지대처럼 능선을 따라 철조망을 쳤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했나 보다.

도성은 분명 조선의 상징 중 하나였다. 일제가 그토록 악착같이 훼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1907년 일본 황태자의 한양 입성을 앞두고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문 아래로 황태자를 지나가게 할 수 없다\'며 성벽처리위원회라는 정부 기구까지 만들어 성벽을 허물었다. 고종이 퇴위한 지 열흘 만의 일이다. 바로 남대문의 북쪽 성벽이 헐렸고 이후 성벽은 몰락해가는 왕조와 운명을 같이했다.

여기서 전설 하나. 태조에게 도성 축조의 명을 받은 정도전이 성터를 결정하려고 고심하던 어느 날. 하루는 눈이 내렸는데 지금의 성터 자리만 빙 둘러 눈이 녹아있었다. 그 눈 녹은 선을 따라 성을 올렸고 \'눈[雪]이 녹은 곳에 울타리를 쳤다\'고 해서 설울, 지금의 서울이 됐다는 설이 내려온다.

http://news.joins.com/component/htmlphoto_mmdata/200406/htm_2004060315374960006800-008.JPG align=right hspace=5 border=1>*** 하산 길에

사직공원부터 쉬엄쉬엄 3시간. 눈앞에 부암동의 민가가 보인다. 산행이 얼추 끝나간다. 적당히 땀도 흘렸고 볼거리도 풍부했다. 그렇다고 안심은 이르다. 아직 트레킹은 끝나지 않았다. 민가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왼편에 흉물스러운 공터가 보인다. \'운수좋은 날\'의 작가 빙허 현진건의 옛집 자리(사진)다. 예가 빙허의 고택이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건 키작은 표석뿐이다. 부암동사무소까지 다다르면 인왕산 트레킹은 마감된다. 여기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나가 다른 교통편을 이용한다.

여기서 보너스 코스가 있다. 길을 건너 오른편으로 50m쯤 오르다 보면 나타나는 손만두집(02-379-2648). 식당 이름이 \'손만두\'다. 손으로 빚은 만두맛이 깔끔하다. 1인분 8000원. 워낙 알려진 집이라 주말엔 예약을 해야 한다.

배가 든든해졌다면 청운동 쪽으로 더 나가자. 창의문(彰義門)이 정면에 서있다. 일명 \'자하문\'. 조선 도성의 4소문 중 하나다. 문을 지나기 전에 꼭 사진을 찍자. 문을 통과하면 촬영이 금지된다. 청와대를 경비하는 군인들이 사진기만 꺼내도 소리를 지른다. 도성의 8개 문 가운데 창의문은 지금 유일하게 사람이 지날 수 있는 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아이러니는 있다. 조선 시대 창의문은 늘 닫혀 있었다. 풍수적인 이유 때문이란다.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에 진입한 이들이 있었다.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 때 일이다.

http://news.joins.com/component/htmlphoto_mmdata/200406/htm_2004060315374960006800-009.JPG align=right hspace=5 border=1>*** 청운동의 비극

청운동은 조선시대 백운동과 청하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날마다 궁궐로 출근하는 명문 사대부들의 집단 거주촌. 겸재 정선의 집이 여기였고 그는 대청마루에 나와 인왕산을 마냥 바라봤다. 국보 216호 \'인왕제색도\'는 그렇게 해서 나왔다.

청운동을 들러야 하는 이유는 하나의 동상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다. 36년전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의 동상(사진)이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이 여기까지 내려왔다가 최 서장 일행과 맞부닥쳤다.

1.21 사태는 당시 정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청와대가 10분 거리인 곳까지 무장공비가 출동했으니 얼마나 섬뜩했겠는가. 인왕산은 즉시 통제됐고, 백악산의 허리를 자르는 북악스카이웨이도 그때 뚫렸다. 남산의 1, 2호 터널도 40만 서울 인구를 신속히 대피시키려는 의도였고, 한강변을 따라 아파트를 올린 것도 북한군의 도강을 저지할 목적이 최우선이었다. 이른바 반공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마루구스병 사건은 그 자체로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그만큼의 공포는 사회에 엄연히 존재했다.

***인왕산은…

인왕산의 한자는 \'仁王山\'이다. \'仁旺山\'이 아니다. 혹 후자로 알고 있었다면 한양의 풍수를 왜곡하려고 했던 일제의 농간에 넘어간 것이다. 해서 인왕산 한자 이름 쓰기는 문화재 해설가 시험의 단골 출제 문제다.

해발 338m. 단숨에 오르기엔 벅차고 다부진 산행을 작정하기엔 밋밋한 높이다. 그래도 뜻 깊은 산이다. 한양을 둘러싼 4개의 산(내사산.內四山) 가운데 풍수적으로 우백호에 해당한다. 주산(主山)인 백악산(속칭 북악산)을 뒤로 한 채 남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오른쪽에 인왕산, 왼쪽에 좌청룡 낙산을 두었다. 무엇이? 경복궁이. 그러니까 왕이 기준이다. 지도에선 인왕산이 왼편이지만 우백호라 불리는 이유다.

인왕산 하면 연상되는 몇 가지. 우선 호랑이다. 1901년에도 경복궁에 호랑이가 출몰한 기록이 있다. 불과 100년 전에도 인왕산에 호랑이가 살았다는 얘기다. 무학대사도 인왕산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다. 조선이 한양으로 도읍지로 정할 때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고 주장한 게 그였다. 정도전의 반대에 밀렸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도 있다. 절친했던 벗 사천 이병연이 숨진 뒤의 심정을 비구름 갠 뒤 인왕산의 모습으로 형상화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김신조. 1968년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의 목을 따러\" 질러온 길이 바로 인왕산과 백악산 사이다. 그 사건 뒤로 인왕산은 93년 2월 24일까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다.

남파 간첩만이 인왕산을 막은 건 아니었다. 예부터 인왕산은 평민에게 참 먼 산이었다. 연산군 때 인왕산 자락의 사찰과 암자.민가가 모두 철거당했다. 그 뒤로 일제시대 전까지 양민은 함부로 오르지도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경복궁을, 다시 말해 왕을 굽어보기 때문이다.

그와 유사한 이유로, 그러니까 청와대가 내려다 보인다는 이유로 인왕산에 올라 사진을 찍는 행위는 93년 뒤에도 금지 사항이었다. 한달쯤 전에 은근슬쩍 금지를 풀었다. 망원렌즈 사용만 단속 대상이다. 산속에서 누가 단속을 하냐고?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 낮에는 경찰이, 밤에는 군인이 철통 경계 근무 중이다. 인왕산은 휴일 다음날 입산 금지다. 공식적인 이유는 자연 보호다.

*** 이용 정보

■ 사직공원 : 휴일 없음. 24시간 개방. 단 사직단은 출입 금지. 주차장 없음.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로 나와 이정표 따라 5분 거리.

■ 인왕산 : 모두 8가지 코스가 있다. 지면의 \'사직공원~부암동\' 코스는 주능선을 남에서 북으로 종단하는 것. 부암동사무소가 산행의 종점. 여기에서 59, 135-1, 136-1, 143-1번 버스를 타고 대여섯 정거장 지나면 경복궁.시청.종로 등 도심이 나온다.

*** 취재 도움 주신 곳

▶사직공원 관리사무소(02-731-0536)▶종로구청 공원녹지과(02-731-0395)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나각순 연구위원 ▶현정회 사무국(02-736-6375)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02-765-2124) ▶문화유산 시민단체 \'한국의 재발견\'(02-723-4206) ▶경찰청 공보과

2004년 06월04일(금), 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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