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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16

구태익 | 2001.08.19 01:01 | 조회 1245
청나라의 멸망을 재촉한 요물(妖物), 서태후(西太后)

서태후는 공식명칭이 자희태후(慈禧太后)이다. 17세에 궁녀로 뽑히어 황궁에 들어갔
고 아들을 낳아 제9대 함풍제(咸豊帝)의 황귀비로 되었으며, 제10대 동치제(同治帝)
의 생모(生母)이자 제11대 광서(光緖)황제의 이모로서 섭정(攝政)을 하면서 48년간 무
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청나라 멸망을 재촉하였다.

함풍제가 죽자 다섯살 난 아들이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동치제(同治帝)였다. 그 후
13년 동안 그녀는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섭정(攝政)을 시작했다. 아들이 18살의 나이
로 일찍 죽자 그녀는 다시 여동생의 세 살난 조카를 광서제(光緖帝)로 즉위 시켜 섭정
의 끈을 놓지 않았다. 허나 광서제는 16세가 되자 친정(親政)을 시도하였다. 그는 우
선 서양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해군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여 기금을 마련하기 위
해 국가재원은 물론 거국적인 모금까지 벌였다. 하지만 서태후는 북양함대를 건설할
경비 3천만냥을 유용하여 이화원을 조성하였다. 이러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을
까? 어찌 되었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이화원의 모습은 서태후 덕분(?)으로 이루
어진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라가 망할 때면 언제나 이런
요물들이 나타나 명을 재촉한다. 하기사 조경사에서 개인이 정원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가 패가망신은 물론 나라까지 위태롭게 했던 예가 어디 한둘이었던가? 프랑스의 니콜
라스 푸케나 일본의 센노리큐(千利休), 송나라의 휘종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인 경우이
다. 하지만 공공을 위한 정원(公園)을 만들어준 영국의 리전트왕자나 미국의 옴스테드
같은 인물들은 얼마나 두고두고 후세에 칭송을 받는가?

서태후가 얼마나 사치했는지에 관해 전해지는 얘기들은 다음과 같다.
서태후의 한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빵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으며
하루 식사비는 은(銀) 3kg 정도의 비용이 들었는데, 그 당시 이 돈으로 5000kg의 쌀
을 살 수 있었으며 만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옷만 해도 3000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입는 사치꾼이었고, 내시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질할 때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난다고 했다(정상적 사람이 하
루에 머리카락 50개 빠지는건 정상). 또한 아주 잔혹하여 한번은 한 늙은 내시가 실
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였고, 서태후 자신은 매일저녁 애기엄마의 젖을 먹
는데 매일저녁 두 애기엄마는 목욕을 한 후 몸에 붉은 천을 감아 젖만 내놓고 다 감싸
도록 하여, 서태후가 침대에 눕고 젖어미는 무릎을 꿇어 태후가 젖을 먹도록 했다고
한다. (...ㆀ허걱ㆀ.....너무나 엽기적이다....)

하지만 서태후가 일생을 두고 가장 유감스러워 했던 일은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午門)
의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오문의 중간문은 황제만 다닐 수
있으며 황제의 결혼식 날 황후의 가마만이 들어갈 수 있었으므로, 서태후가 비록 48년
이나 중국을 통치했지만 황제도 아니고 황후도 아니었기 때문에 드나들 수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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