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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149
무릉박물관 입구 : 2002년 2월24일(일)
무릉은 한나라 무제의 능묘이지만, 무릉박물관은 한무제 때 흉노를 정벌하고 한나라
의 강역을 든든히 한 곽거병의 묘역 앞에 세워져 있다.
곽거병은 한무제의 부인인 위황후 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
여 이모부인 무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18세의 어린 나이에 시중이 되었고 위왕후의 형
제인 외삼촌 위청 장군을 따라 흉노정벌에 나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게 된다. 곽거병
은 먼저 광대한 초원지역인 언지산(焉支山)을 공격한 후, 이어 기련산 너머로 달아난
흉노를 쳐부수어 4만명 이상의 흉노를 포로로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린 것이다.
당시 광활한 하서지방 중에서도 노른자위 땅을 다스린 통치자는 곤사왕(昆邪王)과 휴
도왕(休屠王)이었다. 한나라의 정벌군에 계속 밀리던 곤사왕은 흉노의 천자(天子)인
선우의 질책이 두려워 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을 설득해 투항키로 한다. 그러나 휴도
왕은 투항을 거부하고 전쟁준비를 한다. 그러자 곤사왕은 휴도왕을 꾀어내 죽여버리
고 4만명의 무리와 함께 곽거병에게 항복하고 만다. 곽거병은 항복한 흉노군을 이끌
고 장안으로 개선했는데 10만의 대군단이었다고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전한다.
이후 곽거병은 무제를 도와 서역개척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 젊은 나이로 무려 여
섯 차례나 출정, 번번이 대승을 거두었으나 24세 때 갑자기 요절해버렸다. 이에 무제
는 비통해 마지 않았다고 하며, 그래서 위청장군과 함께 곽거병의 묘도 자신의 능에
나란히 배치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무릉박물관도 한무제의 묘역에 세워지지 않고 그가 가장 아꼈던
곽거병의 묘역 앞에 조성되어 있다.
무릉은 한나라 무제의 능묘이지만, 무릉박물관은 한무제 때 흉노를 정벌하고 한나라
의 강역을 든든히 한 곽거병의 묘역 앞에 세워져 있다.
곽거병은 한무제의 부인인 위황후 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
여 이모부인 무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18세의 어린 나이에 시중이 되었고 위왕후의 형
제인 외삼촌 위청 장군을 따라 흉노정벌에 나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게 된다. 곽거병
은 먼저 광대한 초원지역인 언지산(焉支山)을 공격한 후, 이어 기련산 너머로 달아난
흉노를 쳐부수어 4만명 이상의 흉노를 포로로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린 것이다.
당시 광활한 하서지방 중에서도 노른자위 땅을 다스린 통치자는 곤사왕(昆邪王)과 휴
도왕(休屠王)이었다. 한나라의 정벌군에 계속 밀리던 곤사왕은 흉노의 천자(天子)인
선우의 질책이 두려워 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을 설득해 투항키로 한다. 그러나 휴도
왕은 투항을 거부하고 전쟁준비를 한다. 그러자 곤사왕은 휴도왕을 꾀어내 죽여버리
고 4만명의 무리와 함께 곽거병에게 항복하고 만다. 곽거병은 항복한 흉노군을 이끌
고 장안으로 개선했는데 10만의 대군단이었다고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전한다.
이후 곽거병은 무제를 도와 서역개척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 젊은 나이로 무려 여
섯 차례나 출정, 번번이 대승을 거두었으나 24세 때 갑자기 요절해버렸다. 이에 무제
는 비통해 마지 않았다고 하며, 그래서 위청장군과 함께 곽거병의 묘도 자신의 능에
나란히 배치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무릉박물관도 한무제의 묘역에 세워지지 않고 그가 가장 아꼈던
곽거병의 묘역 앞에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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