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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130

구태익 | 2002.02.27 01:01 | 조회 526
건릉 乾陵(치엔링) : 2002년 2월24일(일)

당고종과 측천무후 : 중국의 4대 여걸 중 하나인 측천무후, 그녀는 누구인가?

13세 때 태종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해 태종이 죽을 무렵 태자(후의 고종)와 깊은 관
계였다고 한다. 태종이 죽자 관습대로 비구니가 되어 불사(佛寺)에 은거하고 있다가
고종이 궁중으로 다시 데려와 소의(昭儀) 라는 비의 지위를 주었다. 궁중내 중신들은
무후가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닌 데다 태종의 후궁이었으므로 고종과의 관계는 근친상간
이 된다는 점을 들어 황후에 봉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무후는 자 신의 세력을 이
용해 중신들을 차례로 숙청하고 궁중내의 비빈들을 제거한 후 마침내 황후까지 폐위시
키고 655년 스스로 황후가 되었다.

고종이 오랫동안 중병이 들어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자 무후가 전권을 장악 했다. 무
후는 뛰어난 행정 수완, 용기가 있었지만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해 궁중 내의 사람
들로부터 사랑없는 존경을 받았다. 690년 65세의 무후는 왕위를 찬탈하여 스스로 황제
가 되었으며, 15년 동안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황제로 군림했다. 무후는 확고한 기
반 위에 새로운 통일제국을 확립했고,사회개혁을 단 행해 중국문화 사상 결실이 가장
많은 한 시대를 만들었다.

독특한 성적(性的) 기호를 가졌던 측천무후는 78세까지 젊은 남성들과 미 소년들을 데
리고 자신의\"하렘\"에서 향락적인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측천무후가 죽고 난
뒤 황실은 권력승계를 놓고 무척이나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었는데, 이 때 이융기(李隆
基)가 젊은 관리들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그의 아버지 예종을 황제로 복위시키
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었다가 바로 2년 뒤 제위를 계승하니 그가 바로 양귀비와의 로
맨스로 유명한 현종(712 ~ 756년 재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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