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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124

구태익 | 2002.08.19 01:01 | 조회 900
언덕 아래에서 올려본 다산초당 : 2002년 8월16일(금)

다산이 이곳 강진으로 유배온 18년간의 세월은 한 개혁사상가의 고통스러운 억류의 세
월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행운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다산의 어머니 해남 윤씨(1728-1770)가 윤덕렬의 딸로, 고산(孤山)의 6세 손녀
이자 詩·書에 두루 능했던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손녀이었으므로(다산의 어머니는
불행하게도 다산의 나이 9살 때인 1770년(영조 46년)에 43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한
다), 다산은 어린 시절부터 지척에 떨어진 해남 연동의 외가 윤씨들과는 가깝게 지내
왔으며 이곳에 유배를 와서도 외가의 도움을 크게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외가의 도움 중에서 무엇보다 큰 것은 전해내려오던 귀중한 천여권의 장서를 볼 수 있
도록 해주었다는 점과 다산초당을 지어주며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다. 초당으로 이주 후 귀양이 풀릴 때까지 修己의 학문으로서 六經(시
경·서경·주역·춘추·예기·악경)과 四書(논어·맹자·대학·중용)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완성하고 治人의 목적으로 一表二書(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를 저술하
였으니 다산초당은 다산학의 산실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 시절 저술활동에 도움을 주며 학문을 토론하던 제자가 18명인데 이중 10명이 해남
외가와 강진의 윤씨들이었다. 또한 외가로 6촌형인 윤지범(尹持範, 1752-1821)이나 동
갑인 윤지눌(尹持訥, 1762-1815)은 평생의 知己들이었으며, 특히 동갑인 윤지눌은 문
과에 급제하여 같이 벼슬하던 이로서 詩同人 모임인 \'竹欄詩社\'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다산이 유배가 풀린 뒤까지도 제자로서 또한 知己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스승
의 학문잇기에 노력하였고, 인근 대흥사의 혜장선사와의 만남 이후 즐기던 차를 보내
주는 정성을 잊지 않았다.

http://www.tasan.or.kr/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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