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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084

구태익 | 2002.08.19 01:01 | 조회 1038
우암의 글씐 바위 원경(遠景) : 2002년 8월15일(목)

우암 송시열 그는?

송시열 (宋時烈) 1607 - 1689 (선조 - 숙종) 문신, 학자. 호는 우암(尤庵)
봉림대군(나중에 효종 임금이 됨)의 사부(師傅)가 되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임
금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른 후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김자점과의 갈등으로 다시 낙
향,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그 후 서인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혔으나, 효종의 장지
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기도 하고, 자의대비 복상문제 때 기년설(상을 일년에 치
루자는 의견) 을 채택한 죄로 덕원으로 유배당하였다.

후에 영중추부사로 기용되었으나 소장과 노장의 분열로 정계를 은퇴하고 은거생활
중, 1689년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
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麴問)을 받기 위해서 한양으로 돌아가
는 도중 정읍에서 임금이 내린 사약을 먹고 세상을 떠났다.

우암은 성격이 과격하여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송시열은 뛰어
난 주자학자였으며 후진양성에 힘써 문하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글씨에도 뛰어났
다. 저서에 <송자대전> <우암집> 등이 있다.

이 고장에 은거한 고산 윤선도 선생과는 우암이 서인이었고 고산은 남인이어서 정치
적으로 대립하는 관계였다 : http://dongramy.schoolpia.net/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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