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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083

구태익 | 2002.08.19 01:01 | 조회 989
송시열의 글씐 바위 : 2002년 8월15일(목)

사람들이 탁본을 해가느라, 바위 암각문이 온통 시커멓게 변하여 글시를 제대로 알아
보기 힘들다. 그런데 서인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선생은 왜 유배를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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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9대 숙종은 인경왕후 김씨가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되어, 인현왕
후 민씨를 맞아 두 공주만 생산하고 왕자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숙종은 당황하여 궁
녀 장소의(나중에 희빈 장씨)로부터 왕자 균을 얻게 되었다. 그 때가 1688년의 일이었
다. 숙종은 왕자를 얻은 기쁨에 1689년에 왕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다.

그러자 서인들이 날마다 상소를 올려 균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으며,
인현 왕후가 나이가 아직 젊기 때문에 기다렸다가 왕후로부터 얻은 왕자를 세자로 책
봉해야 한다다며 궁녀의 소생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법도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하
였다. 그러나 장희빈은 숙종의 총애를 받고있는 터라 숙종 임금의 뜻이 변할 리 없었
다.

너무나 반대하는 세력에 시달린 숙종은 커다란 결단을 내려 반대 상소를 올린 우암
송시열 선생의 벼슬을 박탈하고 유배를 명하였다. 이 일이 \'기사사화(己巳士禍)\'라는
커다란 정치적 사건으로 이어진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83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1689년 제주도 귀양 길에 올라, 범선을
타고 제주도로 가던 중 백도 (지금의 선백도) 앞바다를 지나다가 풍랑을 만나 잠시 선
백도 해안에 상륙하여 머물렀는데 이 때 한 많은 유배 길의 서러움과 외로움을 탄식하
는 시를 석벽에 새겨 놓았던 것이다.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한 달 후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 전라북도 정
읍에서 임금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글씐바위에 새겨진 한시는 정치적 고난을 겪는 노정치가의 쓸쓸한 마음을 엿볼 수 있
어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암 탄시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생전에 마지막 남
겨 놓은 시이다(http://dongramy.schoolpia.net/에서 인용).

이것은 대단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산의 나이 74세 때 승하한 효종의 산릉과 조대비의 복제문제로 서인 송시열 등과
대립하다가 또 다시 함경도 삼수로 유배당하여 7년 4개월이나 고초를 겪다가 돌아온
만큼 고산과 우암은 정치적으로는 반대당에 속한 숙명의 라이벌이었는데, 고산의 정적
이었던 우암이 유배길에 고산이 일궈놓은 보길도에 당도하여 한맺힌 글을 남겼다는 것
은... 인생이란 돌고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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